뜻밖에 문규현 신부는 거기 있었다. 문규현이 글을 쓰고 홍성담 화백이 그림을 그려 함께 만든 책 <그래도 희망입니다> 출판기념 전시회장.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일원으로 지금쯤 한강변을 따라 경기도 양평 어디쯤을 걷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정동 품사랑 갤러리에서 여전히 반백이 넘은 짧은 머리와 다듬지 않은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에 함박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독한 감기에 걸려 며칠을 죽다 살아났다더니 이 혹한에 연일 계속되는 천릿길 도보순례와 한뎃잠을 어떻게 견디어낼까.

문규현은 나의 1년 선배로 서울 소신학교에 같이 있었는데 광주 대신학교로 진학한 다음에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서품연도는 나와 같은 1976년이다. 1년 선배도 분명히 선배는 선배다. 후배한테 황당한 꼴 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가끔 만나는 후배에게 먼저 깍듯이 존댓말을 쓰는 느끼한 선배가 신부들 중에는 더러 있다. 그런 선배는 요즘 아이들 말로 밥맛이다. 그러나 문규현은 언제나 나를 후배가 아닌 동료로 대했다. 말도 편안히 놓았다. 그런 때문에 나도 그를 어영부영 동무처럼 대한다. 만약 그가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나는 금방 눈 내리 깔고 정중히 후배로서의 예를 갖췄겠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 문규현과 그의 새 책과 출판기념 전시장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이미 우리 한상봉 편집국장이 다 했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암만 생각해도 ‘별종’으로밖에는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를 다시 한번 찬찬히 곱씹어보려는 것이다. 별종? 그렇다. 그는 별종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별종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특사로 평양에 가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여학생 임수경과 손을 꼭 잡고 휴전선을 걸어 넘어오던 때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빨갱이 괴수라고 목에 핏대를 세웠나. 교회 안에서도, 특히 장상들과 나이 든 선배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문을 활짝 열고 그를 환영해준 건 오직 감옥뿐이었다. 면회실 철창 저편에서 수의를 입은 문규현은 활짝 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가고 싶어 간 게 아니야. 떠밀려 갔을 뿐이지. 이제 터치교대해야지.” 그건 결코 억울하다, 후회스럽다는 뜻이 아니었다.

노무현 정권에서도 새만금 매립 작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문규현은 죽어가는 개펄을 끌어안고 목숨을 건 삼보일배를 시작했다. 도대체 듣기에도 생소한 삼보일배가 뭔지 우리는 몰랐다. 그 숨막히게 침통하고도 장엄한 행렬 맨 앞에 문규현은 있었다. 별종이라면 더 별종인 형 문정현 신부는 내 동생이 죽을지도 모른다며 울먹였다. 문규현은 그의 신학교 동기인 한 성직자에게서 예전 같았으면 파문감이라는 혹독한 비난까지 받아야 했다. 쪽박이 박살나는 아픔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는 승리했나? 천만에! 그는 무참히 깨졌다. 그뿐 아니라 평택 대추리에서도 문규현은 형과 함께 처절하게 패배했다.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 싸움에서 문규현은 모처럼 만세를 불렀지만 그것은 그의 근본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핵폐기장은 다른 만만한 곳을 찾아 거처를 옮겼을 뿐이니 근본적으로 생명평화를 지향하는 문규현은 이번에도 결코 이긴 싸움을 한 게 아니다.

환갑이 넘었다. 그만하면 할 만큼 한 거 아닌가?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 질 때마다 온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싸움, 그러면서도 칭찬이나 격려는커녕 무수한 몰매와 욕설만 뒤집어쓰는 짓을 그는 왜 끈질기게 계속하는가? 문규현은 바보인가? 어린애 같은 영웅심에 사로잡힌 사람인가? 그렇게 속단하기에는 그는 너무 맑고 순수하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샘솟을까? 성령의 기운?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수를 끝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한.

평택 농민들을 무장병력으로 진압할 계획을 세웠던 사람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한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앞으로 5년, 문규현은 또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할까?

호인수 200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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