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나는 어떤 단어와 사랑에 곧잘 빠진다. 이 특이한 종류의 사랑은 수십 년을 따라다니면서, 나의 마음 속에 단정한 자리를 잡는다. 예를 들면 '하늘나라', '대림절', '거리' 등이 내가 사랑하는 단어들이다. 대학 다닐 때, 하늘나라란 단어가 좋아서 혜화동 골목길에 있는 '하늘나라'라는 분식집을 무척 자주 갔었다.

영성을 나의 학문으로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나는 '식별'이란 단어에 매료되었다. 혼자 이 책, 저 책을 읽어 가며, 나의 알 수 없는 끌림을 해결해 보려 했지만, 딱히 명료한 답을 얻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영성을 내 학문으로 시작하고, 식별에 관한 모든 수업을 쫓아다니면서 듣고, 연구하면서 식별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나는 이 단어를 사랑하며, 아직도 그 의미를 다 알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나는 내 방식으로, 식별을 성령과 함께 추는 춤으로 이해한다.

식별은 디선먼트(Discernment)라고 하는데, 이 말은 무언가 구분 지어 갈라놓다는 뜻의 단어(discretion)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갈라놓는다는 건가? 그건 여러 가지가 엉켜 있는 삶의 경험 가운데에서, 선한 영, 즉 하느님의 뜻을 찾아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설명의 취약점은 마치 하느님의 뜻이 이미 정해져 있어서, 나의 뜻을 모두 없애 버림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느님의 모든 뜻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식별은 결국,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주파수를 맞추었을 때, 따로 떼어져 남겨지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실 굳이 식별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하고, 또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 식별이다. 신앙인으로서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데,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부딪치는 대부분의 경우는 교과서처럼 단순하거나 응용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때로는 그 문제 안에 내가 가진 모순을 그대로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르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과 조율할 수 있겠는가?"

▲식별을 시작한다는 것은 계속 마음을 열고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식별할 때는 그날의 복음이나 강론 말씀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수다나, 우연히 보게 되는 신문 기사 구절, 혹은 사진 등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에 예민하려고 한다. ⓒ한상봉 기자
이냐시오 성인은 식별의 전제로 무관심한(indifferent)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사실 이 말은 조금 부정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 것에도 흥미가 없는 심드렁한 태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을 잘 들여다보면, 자기의 아집이나 의견에 집착하지 않는 내적 자유로움을 가졌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나부터도 식별의 과정 자체에 마음을 열기보다는 미리 방향을 다 정하고 식별을 시작하는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식별의 전제는 새롭게 다가올 미래를 향해 깜짝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혹은 내가 '보여 준' 땅이 아니라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야훼의 말씀에 길을 떠났던 일흔 살의 아브라함처럼 떠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자유가 있다면, 그 다음에 하는 작업은, 만약에 이런 결정을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미리 저울로 재어 보는 것이다. 이런 결정을 해서 좋은 점(pro)을 하나하나 적어 보고, 이런 결정을 함으로써 나에게 올 어려움이나 고통들(con)을 하나하나 생각해서 적어 본다. 이 리스트는 식별이란 춤 전체의 리듬을 결정한다고 하겠다.

적어 놓은 리스트는 식별하는 사람의 가치 척도들 드러낸다. 예를 들어,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갈 것인지를 식별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에 친구들과 헤어짐을 적어 놓았다고 할 때, 식별하는 자는 그 어려움의 무게, 그 가치가 본인에게 얼마만큼 중요한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록 어려움 쪽이 양적으로는 훨씬 많아도, 한두 가지 좋은 쪽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그 사람은 결국 그 식별 내용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식별 전반에 있어 결국 중요한 것은 내적 태도다. 식별을 시작한다는 것은 계속 마음을 열고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식별할 때는 그날의 복음이나 강론 말씀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수다나, 우연히 보게 되는 신문 기사 구절, 혹은 사진 등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에 예민하려고 한다. 가끔 친구들과의 부담 없는 이야기 속에서 식별의 방향이 정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듣기는 단순히 귀로 혹은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온몸으로 우리는 듣는다. 미국에서 수도원 입회를 놓고 식별하던 때의 일이다. 나는 아직 미국에서의 나의 성소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라는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다른 여러 가지 조건상 입회를 하면 좋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노우"라는 말을 하는 순간, 내 몸속의 모든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랫배가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아, 나의 결정이 바른 것이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 나중에 성서학자인 나의 지도 교수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너는 좋겠다. 내 몸은 언제나 침묵하는데……" 하며 하하 웃었다. 물론 남자들도 적지 않지만, 여성들 중에는 몸이 많은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몸 혹은 몸의 반응은 식별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준다.

내가 식별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또 내 스스로 식별을 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단서는 자신의 욕망(desire)에 유의하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영성에서 욕망은 항상 위험하고 없애 버려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 와서는 욕망의 자리를 가장 아름다운 자리로 본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르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과 조율할 수 있겠는가? 자기의 욕망이 놓여있는 자리는 자신의 소망이 깃드는 자리이고, 그 소망은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식별이, 바로 과정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인생도 없고, 이미 정해져 있는 선택도 없다. 최고의 식별을 배우겠다고 악을 쓰는 내게, 교수는 "세상에 나쁜 식별은 없다. 다만 좋은 식별과 좋은 선택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매 순간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그 순간에 최선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식별을 사는 것이다.

슬픔은 서서히 고요한 상처로 가라앉고, '나쁜 수녀'가 되기로..

마지막으로, 내가 경험한 참으로 치열했던 식별의 순간을 나누고 싶다. 2000년, 나는 한국 수도회에서 수도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미국에 남아 박사 과정을 시작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수도생활을 처음 배운 한국의 수도 공동체,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수녀님들, 친자매 같은 친구 수녀님들, 내게 참 다정했던 주방 수녀님, 그이들을 배반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컸고, 후배 수녀님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러나 한편, 내게 주어진 초대, 여성 중심의 학문을 깊이 하라는 이끄심은 선택의 여지 없이 강한 것이었다. 내 영혼은 두 개의 다른 방향 앞에서 쪼개지는 고통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시간에 두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한 통은 한국의 수도 공동체에서 온 편지로, 공부를 계속 시키지 않기로 했으니 당장 귀국하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장학금과 함께, 박사 과정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하루 종일 호숫가를 거닐면서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첫 편지를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수도회에 화가 나서 엉엉 울었고, 또 내가 합격했다는 소식을 생각하면 뛸 듯이 기뻤다. 그날 늦은 밤 감실 앞에 앉아, 두 감정의 절대값을 따져 보니, 수도원에서 온 편지의 결과로 내가 경험해야 하는 고통보다, 공부를 시작한다는 기쁨이 더 큰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그 기쁨은 여전한 반면, 슬픔은 서서히 고요한 상처로 가라앉아 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나쁜 수녀가 되기로 작정했다. 내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나는 식별에 관한 수업을 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나누어 준다. 어떤 학생이 물었다. 박사 과정 합격한 게 왜 그렇게 기쁜 것이냐고. 나는 말했다. "내 욕망이 가치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거든." 자기가 존재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두려운 일이다. 하여튼 이 식별 과정은 내게 욕망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울며 힘들게, 그렇게 나는 성령과 함께하는 춤사위 하나를 배운 것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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