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에 만난 동생이 내게 이런 충고를 했다.

“형은 이제 욕하고 비판하는 글 좀 그만 써. 만날 그런 글만 쓰면 싫은 소리 듣잖아.”
“어? 아닌데. 남을 욕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쓰는 거잖아. 내가 성찰하고 내가 반성한다고.”
“그게 그거지. 암만 아니라고 해도 보는 사람은 다 알아.”

그런가? 제 눈에는 내가 마치 싸움닭 같아 보이나보다. 그러니 어쩐다? 오늘도 또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그 날 동생네 식구는 그때까지 다니던 본당에서 분할되어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는 상가 건물에 미사 참례하러 간다고 했다. 사전에 신자들의 여론이라도 수렴하더냐고 물으니 어느 날 갑자기 본당신부님이 본당을 분할하기로 했다면서 어디어디 구역 신자들은 언제부터 그곳으로 가라고 하더란다. 동생의 시큰둥한 한 마디, “일방적인 통보지 뭐.”

내가 살고 있는 부천시 고강동은 지금 뉴타운 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단독주택이나 연립주택은 물론 성당 건물까지 헐리고 새로 짓게 되는 것인지, 기다, 아니다, 말들이 많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동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경기도나 부천시에서 우리 동네를 뉴타운으로 개발하는 문제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주민의 의사를 물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주민 공청회조차 없었다? 요즘 세상에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이건 사기극이다. 도대체 고강동 지역 뉴타운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개발인가. 전 주민의 70%가 세입자인 동네에서 뉴타운 건설 계획은 보나마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것이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혼란과 불상사는 불 보듯 뻔하다. 대다수 저소득층 세입자들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한 뉴타운 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게 순리다.

도시화에 따른 인구증가 때문이든, 신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 덕분이든, 본당에 신자들이 넘쳐나 성당을 늘리거나 새 살림을 내지 않고는 효율적인 사목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참 반가운 일이다. 신자수의 증가와 교회의 성장에 따른 장, 단기적인 대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본당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분할 신설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이 신자들 안에 조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목자가 일방적으로 지도에 금을 긋고 새 본당 설립을 강행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신자들을 무시하는 무례한 처사다. 민주사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는 종종 일어나니 하는 말이다. 정작 귀한 돈 내서 집 짓고 살며 운영할 주인들은 소외시키고 엉뚱한 사람들이 골방에 모여앉아 의사봉을 두드리는 셈이다. 이래도 되나? 언제부터 우리 천주교회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관행이 마치 불문율인 양 버젓이 전해져 내려왔을까. 사목자의 뜻은 여전히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느님의 뜻인가. 그런 결정에 무조건 순명하는 게 신자의 도리요 덕망인가. 우리 신자들은 언제까지 봉(鳳)일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본당의 분할 신설을 무조건 반대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를 위해서, 왜 필요한가를 사목자와 신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꼼꼼히 따져보자는 것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거기 살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그런 다음엔 의당 교우들의 뜻을 물을 일이다. 그것도 본당의 유지들 말고 대다수 익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물을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를 일이다. 그게 싫으면 신자들의 쌈지를 털지 말고 교구가 땅 사고 성당 지어서 주변에 사는 신자들을 초대하라. 이게 정석이고 정의다.

호인수 200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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