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병원 응급실은 참 가기 싫은 곳이다. 우리가 살아서 보는 일상의 지옥 중 하나일지 모른다. 응급 상황에 빠지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그렇기에 응급실은 불안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준다. 생사를 오가는 극적 순간들이 저절로 펼쳐지니 드라마가 선호하는 무대로는 제격이다.

세중병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

MBC 월화극 <골든타임>은 병원이 무대다. 여타의 의학 드라마와 달리, 이 병원은 서울이 아닌 부산 해운대에 있다. 의료진도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아니 해외에서까지 이 병원으로 몰려들어 지원한다. 세계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이 바닷가 병원으로 면접을 보러 오고 채용되는 구조다. 그만큼 대우도 좋고 시설도 좋다. 의료 기술도 단연 정상급이다. 단 초짜들의 실습장인 응급실만 제외하고.

그런데 거슬리는 게 있다. 왜 하필 병원 이름은 '세중'인가? 정권의 복심(腹心)으로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다 수십억 수뢰 혐의로 수감됐으나 신병을 이유로 풀려난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의 이름이 아직도 뇌리에 선연한데, 하필 지금 20부작 드라마로 '해운대 세중병원'을 지켜보기란 뒷맛이 쓰다. 내가 너무 과민한 탓인가?

해운대에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로 극중 이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오는 많은 환자들은 여행객들이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추락하거나 해파리에 쏘여 실려 오거나, 어쨌든 놀러온 사람들이 많다. 그 놀러온 사람들을 상대하는 유흥업소 종업원도 가끔 실려 온다. 기부천사로 인터넷을 통해 슬픈 감동을 준 현실의 배달원 사연도 재빨리 극화시켰다. 응급실에서 인턴들을 혼낼 때도 "휴가 온 사람들 보다 보니까 정신이 휴가 갔냐?"는 말을 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치료 받는 병원 상황이라기보다는 매우 특수한 곳에 특수한 목적으로 세워진 병원처럼 보이게끔 설정돼 있다. 무슨 리조트 전용 병원 같기도 하다. 나라 안 주요 인사들이 하필 해운대에 들렀다가 이 병원에 입원하곤 하니까. 일개 인턴이라 주로 하는 일은 '관장'이지만 실은 이사장의 손녀인 강재인(황정음 분)은 열받는 상황에서 가운에 슬리퍼 차림으로 택시를 타고 특급호텔로 간 적도 있다. 하룻밤 수백만 원짜리 방에서 거품목욕으로 열받음을 식히고 다시 일터로 돌아오기도 했다. 무슨 회식 자리조차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들이다.

최대한 남들의 비일상성 속에 세워진 병원인 것이다. 이 정부의 '살아 있는 권력'들이 '경제자유구역' 내에 추진한 '영리병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건강보험 민영화도 여전한 불씨다. 송도에는 이미 주민의 반대를 거스르며 추진 중이고 특히 제주도 영리병원에 대한 정부의 집착은 집요하다.

최인혁, 그의 설 자리는 있나?

초반에는 밋밋했던 이 드라마를 살려낸 건 그야말로 중증외상센터의 최인혁 교수, 아니 우리가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배우 이성민 덕택이다. 고독한 방랑자 같은 카리스마와 독보적 실력, 불행한 개인사, 허기와 허탈함을 동시에 가진 쓸쓸한 미소. 그는 이 병원의 '왕따'지만 실제로는 이 병원의 명성을 떠받치는 주인공이다. 그리고 어느덧 드라마 <골든타임>을 떠받치는 아틀라스가 돼버렸다.

아무리 심각한 외상 환자도, 거의 황천길을 다 건너가려던 중상자도, 최인혁 교수의 수술대에만 누울 수 있다면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제한시간인 그 '골든타임'이란 아마도 최인혁의 눈에 띄고 최인혁의 손에 수술 받는 행운의 기회를 말하는 것 같다.

이런 그는 실제로는 병원 운영에 골치 아픈 통제불능의 존재다. 이 드라마가 내내 강조하는 '수익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합병원 시스템을 알면 수긍이 간다. 그간 '비영리병원'이었다고는 하나, 우리의 병원은 돈 없으면 치료해 주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최인혁은 피 흘리는 환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일단 소생시키고 봐야 한다. 내내 옆에서 손발이 돼 줘야 하는 코디네이터 신은아(송선미 분)와 최인혁 교수의 대화다.

"선생님 처음 뵜을 땐 살짝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예."
"미친놈 맞죠."
"(지켜보니) 제대로 미친 사람이세요."

결국 중증 환자들과 '병원 수익'을 봐 가면서 환자를 받으라는 운영진 사이에서 '자리' 하나 없이 배제 당하던 최인혁은 "나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라면서 수년간 품고 다녔던 사직서를 낸다. 물론 환자들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지위도, 중증외상센터의 존속 여부도 내내 불안하기만 하다.

환자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

인술의 화신과도 같은 최인혁이 편히 일할 병원은 적어도 극중에선 이 땅에 없다. 그가 리비아로 떠나려 했던 이유다. 모든 것을 감내하는 영웅 최인혁의 배출도 어쩌면 배우 개인의 재능에 기댄 우연일 수 있다. 드라마가 돈 없는 환자들을 위한 의료복지의 의도를 품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드라마는 사실 의대에 간 애송이들을 실력 있는 의사로 키워내는 데 골몰하고 있다. 그 실력으로 장차 뭘 하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서러운" 이민우(이선균 분)같은 초짜는, 돈 없는 가장에게 "희망 놓지 마세요!"라며 퇴원을 말린다. 어린 아들이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는데 치료를 중단할 때는 다 돈이 없어서다. 우리나라 병원이 무슨 치료비 부담 없이 회복되기만 기다려 주는 곳도 아니지 않은가? 견습 의사의 진심이 철없어 보일 지경이다.

"의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 인혁이 민우에게 던진 첫 질문이다. 실력이 없어서 환자를 못 살린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민우의 인생을 바꾼 질문이었다. 그러면서 인혁은 쓸쓸히 말한다. "내가 인턴 시절엔 어땠는지 아나? 그때도 두렵고 지금도 두렵다. 그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것뿐이다."

그럼, 환자는 무엇이 가장 두려울까? 처음엔 최인혁 같은 명의가 아닌 돌팔이를 만나게 될까봐 두렵고, 나중엔 치료비 부담이 두렵지 않을까? 모든 의료서비스가 무상이며 의료진이 공무원인, 심지어 병원에서 차비와 '환자수당'까지 지급하는 유럽의 복지정책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돈 없고 아플 때 갈 데가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게 돈 없이 병드는 것이라는 공포를 자극하는 보험광고 말고, 우리가 의지할 것은 반드시 국민을 위한 의료시스템이어야 한다.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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