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오리새끼>, 곽경택 감독, 8월 30일 개봉

1987년 그 시절. 40~50대는 그럴듯한 모험담을 하나씩 품고 있다.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 이야기를 끝없이 해댄다. 87년 이야기에 군대 이야기가 합쳐진다면? 헐! 꼰대들의 수다쇼가 될 게 뻔하다. 게다가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침을 튀기며 “우린 친구 아이가!”를 외치는 경상도 사내들의 허장성세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똥폼 잡으며 ‘의리’ 따위나 입에 달고 사는 사나이들의 영화 <친구>, <태풍>, <사랑>은 잊자. 곽경택 감독이 도시 근교의 허물어져 가는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소한 유머로 무장한 <억수탕>으로 데뷔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자. 그의 영화에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날 것이 주는 소박함과 친근함에 유머와 따뜻함이 넘쳤다. <억수탕>은 엽기 전문 조연배우였던 방은희를 중심으로 목욕탕에 때 밀러 온 다양한 인간 군상을 배치하여 일상에서 벌어짐 직한 가벼운 에피소드들이 모자이크를 이루어 해피하게 끝나는, 추억하는 자 없으나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그 이후 곽경택 감독은 <친구>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액션 블록버스터 전문 감독이 되었고, 몇 편 영화의 흥행 부진을 겪다가,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그곳에서 눈여겨본 연기지망생들을 모아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 자신의 부산에서의 방위 군복무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든, 1987년을 추억하는 영화를. <억수탕> 15년 후, 한 곳에 모인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 세상을 은유하는 특별한 코미디 <미운오리새끼>가 바로 그것이다.

23살 낙만(김준구)은 6시에 칼퇴근하는 방위 생활을 시작한다. 일명 신의 아들 '6방'이지만, 집안 좋아 빽 좋아 '육방'이 된 것은 아니다. 전직 사진기자 아버지(오달수)는 80년 광주 사진 취재로 인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휴유증으로 정신이 반쯤 나갔고, 어머니(김성령)는 이혼 후 미국으로 떠났다. 낙만은 본래 이발병으로 입대하지만 잡병이 되어 군 생활을 해 나간다. 행사가 있는 곳에는 늘 출동하는 찍사 사진병, 헌병대장 취미 전담 바둑병, 맨손으로 변소 청소병, 헌병 대신 영창 근무 서기 병 등. 군부대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인 멀티플레이어지만 육방이라는 이유로 매일매일 헌병들의 구박과 무시 속에 산다. 얼른 이 생활을 마무리하고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갈 꿈으로 버티며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생활 속에서 그는 온갖 희한한 인물들과 부대낀다.

헌병대 대장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의욕이 넘쳐 과잉 충성하며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악당 중대장(조지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헌병대에 오게 되지만 궂을 일을 마다하지 않는 만능 일꾼으로 스님이 되고 싶은 행자(문원주), 요령을 터득하여 편하게 군 생활 하는 방법을 아는 눈치 빠른 간부 인사계(양중경), 취미 생활로 바쁘지만 칼 같은 성격 탓에 출세는 빠른 헌병대장(고영일), 여상 출신으로 집안을 돌보기 위해 직업 군인을 선택, 낙만의 순정의 대상이 되는 권하사(박혜선), 서울대 출신의 정상적 인간 같아 보이지만 낙만으로 하여금 영창 생활을 하게 만드는 연적 헌병, 나이도 어린 게 군기는 제일 확실히 잡는 스무 살 헌병, 매사 투덜거리면서도 칼퇴근 맛으로 버티는 방위병들. 이 좁은 병영 안에는 사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인간들이 산재한다.

이렇듯 주인공이 마주치는 다양한 인물들이 바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서사가 된다. 낙만은 이들과 하나하나 부딪히면서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나고 다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시간아 흘러라! 육방 낙만이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짊어졌는지 의아하게도 많은 사건들이 펼쳐진다. 그러다가 서사가 진행되면서 어느덧 어색하게 쓴 헌병대 모자에 엉거주춤하게 총을 들고 “추~엉~성! 전낙만!”을 외치는 웃기는 캐릭터 낙만도 진지해진다. 작은 웃음 조각들의 태피스트리가 비장미 넘치는 액션 시퀀스로 이어지며 영화는 무겁게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그러나 어쩌랴. 87년은 무겁고도 억울한 시대였으니…….

새로운 얼굴의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은 신선하고, 낙만과 각각의 캐릭터들이 맺는 관계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다양한 인간 군상 속에서 나뒹구는 낙만의 군 생활은 세상 공부, 인생 공부의 장이다. 남자라면 비껴갈 수 없는 군대, 40대 이상의 중년이라면 잊어버릴 수 없는 특별한 기억의 시대 87년. 그 두 가지 기억이 합쳐진 이 영화는 재미있으면서도 청춘을 돌아보게 한다. 엄청난 승리의 기쁨과 곧 이어질 좌절의 상처로 남은 87년을 이제는 웃으면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나 보다. 칠공주 언니들의 성장담 <써니>처럼 <미운오리새끼> 역시 매캐한 최루탄 냄새 속에도 좌충우돌 웃음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아프고 촌스러웠던 그때를 아련한 향수로 그리워할 만큼 세월의 더께가 쌓였나 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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