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박혜령 영덕 핵발전소투쟁위 집행위원장] "탈핵은 행복한 삶 진지하게 되묻는 것"

정치인, 혹은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들을 떠올릴 때 몇 가지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감정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냉철함, 속내를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 좋은 의미만은 아닌 권력 지향성, 반응과 효과가 계산된 발언과 행동.

▲ 4·11 총선 선거운동 당시 박혜령 위원장이 지역 주민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고 있다. ⓒ영덕투쟁위

지난 4월 11일에 치러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북 영양·영덕·봉화·울진군 선거구에 녹색당 후보로 출마했던 박혜령 씨. 그는 그런 전형적인 정치인의 냄새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움직이지 않는 주민들을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내가 아닌 우리'가 하는 정치를 생각하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할 때도 속내를 투명하게 드러냈다. 귀농 17년차 농민, 그리고 영덕 핵발전소유치백지화 투쟁위원회(이하 영덕투쟁위) 집행위원장으로 영덕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그를 만났다.

새누리당의 텃밭에서, 돈도 사람도 없이 치른 선거가 그에게 남긴 것이 궁금했다. 박혜령 위원장은 선거가 "힘들지 않았다"며 웃었다. 선거 캠프에 참여한 녹색당원들이 자기 선거로 여기고 열심히 해 줬기 때문에 자신도 그저 열심히 했을 따름이라고 한다. 그는 4·11 총선의 의미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선거가 끝난 후 녹색당 식구들에게 인사하면서 '이 선거는 처음부터 저 개인의 선거가 아니었다. 작게는 녹색당의 선거, 크게는 탈핵을 염원하는 이들의 선거'라고 했어요. 결과를 떠나서 어떤 식으로든 '모두의 결과'이며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선거의 의미는 '당선'뿐만이 아니에요. 지금은 탈핵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중요하지요."

귀농 17년차 여성, 정치를 생각하기까지

그는 "자랑스럽지도 않고 할만한 얘기도 아니지만" 너무 복잡하게 부딪치며 사는 삶이 지겨워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2002년에 영덕으로 귀농했다.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국가, 혹은 정치 권력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는 외진 곳이라 여겨 고르고 고른 지금의 마을조차 정부와 행정 당국의 횡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됐다.

"2007년 동네에 심한 갈수기가 있었어요. 극심함 가뭄이었죠.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면사무소에 갔더니 '당신들이 산골짜기에 살아서 그런 것이니 비가 올 때까지 옆 동네에서 길어다 마셔라' 하더라고요."

면사무소는 군청에, 군청은 면사무소에 떠넘겼다. 횟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끊임없이 관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당국은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고 수많은 항의와 탄원서는 묵살되었다. 당시 이장이었던 남편이 직접 부딪히면 힘들 것 같아 부녀회장인 박혜령 씨가 직접 나섰다. 서명을 받고 갈천 2리 주민 40여 명이 영덕군청 앞에서 시위를 했다. 한 마을 주민 전체가 나서 시위를 벌인 건 군청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위 이후, 군청과 면사무소 공무원들은 동네 주민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남편에게 이장을 그만두라고 했다. 당시에 관에서 "이장을 그만두게 하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후임 이장을 맡은 주민은 마음고생도 하고 부담스러워 하다 1년 만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다. 마을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다시 이장이 된 남편은 지금까지 계속 일하고 있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 박혜령 위원장은 '관(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런 삶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는 '모든 갈등이 모여 있는 세상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졌다. 이제 더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느꼈다. 완전히 개인적인 삶을 살겠다던 자신에 대해, 지난 시간에 대해 '반성'했다. 한 달간 울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삶'을 넘어 '세상 밖으로' 나섰다.

8월 21일 영덕 영해성당에서 박혜령 위원장(가운데)과 영덕투쟁위 소속 주민들이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범종교 생명평화 순례단에게 영덕 핵발전소 유치 과정과 반대투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10명의 영덕 핵발전소 유치 백지화 투쟁위원회, 눈물 속에서 출범하다" 

그는 영덕 핵발전소 유치과정과 영덕 투쟁위 활동 과정에서 관으로부터 받은  압력을 상세히 설명했다. 2010년 12월 30일, 김병목 영덕군수가 핵발전소 유치를 신청했다. 영덕에서는 이전에도 3번의 반대운동이 벌어졌다. 그중 1989년, 2003년은 군청과 면사무소가 함께 주도한 반대운동이었다. 군수가 유치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군수가 유치에 찬성하자 반대운동 자체가 어려워졌다. 반대하는 주민들에 대한  관의 압력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이라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생계가 어려워져요. 관에서 하는 각종 지원사업을 받지 않는 농민이 없으니 관에 밉보이면 안 되요. 생계가 어려워지거든요. 주 고객층이 공무원인 식당도 마찬가지예요. 600~800명에 이르는 공무원들에게 밉보이면 바로 문 닫아야 해요. 2005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집회에 참가해서 벌금형을 받으면 300~500만 원인데 그것도 농민들에게는 큰 부담이죠."

영덕대책위는 박혜령 씨와 그의 남편, 그리고 마을 농민 이병호 씨까지 세 사람으로 출발했다. 영덕성당 김영식 신부의 도움으로 뜻있는 이들을 만나며 10명이 되었다. 발족식 전에 지역에서 강연회를 열자 형사들이 와서 참석한 주민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2011년 6월 14일 발족식을 앞두고 현수막을 제작했는데 발족식 바로 전날, 현수막 제작을 맡은 주민이 전화를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공무원으로부터 "형님, 영덕에 안 살고 싶습니까?" 하는 협박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는 현수막을 제작했지만 주지는 못하겠다며 울었다. 행사 당일 박혜령 위원장은 포항에 연락해서 급히 현수막을 구했다. 아무도 없이 10명이 급조한 현수막을 들고 행진을 벌였다.

박혜령 위원장 ⓒ문양효숙 기자

그뿐이 아니었다. 당일 발족식을 취재한 기자는 편집장으로부터 "왜 그런 행사를 취재하느냐"고 문책을 당한 뒤 박혜령 위원장에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발족식을 마친 후 박혜령 위원장은 4시간을 울었다. 그는 "그렇지만 대책위 10명은 지치지 않고 지금까지 오고 있다"며 울어서 코가 빨개진 채 미소 지었다.

박혜령 위원장은 차마 나서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고 했다. '많이, 아주 많이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아서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협 받고 있어요. 지역에 빨치산의 은거지였던 곳이 있거든요. 주민들 중에 빨치산을 도와주러 갔다가 잡혀가고 고문 받았던 사람들이 꽤 있어요. 트라우마가 됐지요. 마을 전체에. 그러니까 잘 나서려고 하지 않아요."

영덕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내고 공론화해야 하는 것은 핵발전소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핵발전소라는 표상을 중심으로 역사 청산의 문제, 그로 인해 부서진 민주주의, 사람들의 오랜 상처가 뱀처럼 똬리 틀고 있었다.

박혜령 위원장은 영덕의 방사능폐기물처리장 유치 추진과 핵발전소 건설 결정 과정에서 민주주의 절차와 주민자치가 완전히 붕되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지역 주민들을 직접 만나며 다시 희망을 품었다. "외부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서로는 많이 형성되어 있어요. 일본 후쿠시마 사고를 보며 '핵은 안 된다. 청정지역 영덕을 지켜야 한다'는 정서가 퍼졌거든요." 영덕 시내를 돌았던 종교인 순례단도 "시장을 돌 때 주민들이 응원을 많이 해주셔서 놀랐다"고 전했다.

"삶의 형태에 대한 총체적인 논의가 필요한 때, 우리는 어떤 삶을 행복하다고 할 것인가?"

박혜령 위원장은 지난 6월 6일 "핵발전소 주변 지역, 다음 세대의 아이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반핵운동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자" <탈핵신문>을 창간하고, 김준한 신부(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9월 1일에는 대구경북탈핵연대가 출범할 예정이다. 영덕, 울진, 상주, 안동, 구미 지역 대부분의 시민단체와 대구대교구 ·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개신교, 정당이 함께한다. 박혜령 위원장은 대구경북탈핵연대 출범을 시작으로 탈핵 이야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펼칠 계획이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몇 명의 활동가가 아니라 탈핵을 진짜 정치적 힘으로 만들기 위해 전국적 움직임이 필요해요."

▲ 4·11 총선 당시 녹색당 후보로 나선 박혜령 씨(왼쪽에서 세 번째) ⓒ영덕투쟁위

"10여 명의 영덕투쟁위 분들이 1000명의 힘을 내요. 작년 출범 이후 1년 반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말로 할 수 없는 힘이었지요." 그는 영덕을 찾는 많은 이들과 전국에서 보내는 연대의 기운도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큰 힘이라고 했다. 그러나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이것은 영덕의 문제가 아니에요. 본인의 문제,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문제죠."

지난 3월 발간한 <녹색당 선언>에서 그는 끊임없이 전기를 생산하는 핵발전소와 에너지 정책에 대해 비판했다. "살림을 꾸릴 때, 지갑 안에 100원이 있으면 100원 안에서 쓰죠. 그런데 지금 에너지 정책은 내가 100을 가지고 있는지 200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 100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는 "산업용 전기를 싼 가격에 공급하면 도시는 24시간 영업, 3교대 근무 등이 증가하고 끊임없는 소비의 길을 걷게 된다"고 지적하며 이것을 부추기는 에너지 정책이 계속되는 한 개인적 차원에서의 행복 추구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소비에 대한 철학이 재정립되지 않는 한, 어떤 대안 에너지도 우리를 충족시킬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끄는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지요. 삶의 형태에 대한 논의 말이에요. 끊임없는 발전이 우리의 정답일까요?"

그는 '적절하게 채우고, 더불어 행복을 느끼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열심히 울고 열심히 뛰고 있다고.

정치에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번의 선거 결과를 보며 민주주의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권력 획득과 정책 결정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변화, 그로 인한 지역의 미세한 꿈틀거림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찾는다면 어떨까? 무게를 잴 수 있고 수로 환산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는 민주주의와 정치를 말한다면 어떨까.

그를 만난 후, 그런 정치에, 그런 민주주의에 다시 희망을 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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