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다. 오늘 낮에는 백령도에 사는 친구 부부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닌다는, 올해로 스물여섯이 된 딸을 데리고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싱싱한 전복 한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 백령도는 내가 꼭 20년 전에 발령받아 2년을 살던 곳인데 아직껏 잊지 않고 찾아주다니 난 참 복도 많다. 저 아이가 그때 우리 성당 성모유치원에 다니던 그 아이였나? 예쁘게도 컸구나. 저 나이 먹어가는 건 모르고 아이들 크는 것만 대견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는 새해 인사를 으레 두 번씩 한다. 새 달력의 첫 장을 열며 습관처럼 ‘복 많이’를 빌고, 흔히 구정(舊正)이라고 하는 설날 세배를 드리고 받으며 한 번 더 한다. 언뜻 ‘봉마니’로 들린다. 봉? 봉황도 봉이요 멍청해서 이용당하기 십상인 놈도 봉인데 어떤 봉을 말하는 건지.... 어쨌거나 복이든 봉이든 서로 주고받는 기분은 매우 좋다. 요즘엔 또 ‘복 많이’ 대신 ‘부자 되세요’ 라고도 하던데 복 중에 큰 복이 그저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내가 지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직자 티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쫄쫄이 배를 곯아본 적이 없어서 하는 소린지 모르겠으나 부자 되라는 덕담(?)은 하기도 싫고 듣기도 언짢다. 너무 돈독이 오른 사람 같아 보여서다. 그렇지만 올해는 누가 그런 인사한다고 비난하거나 우습게보고 콧방귀 뀌지 말자. 오죽하면 그러랴 하고 넘어가자.

나는 4녀2남 중 다섯 번째, 장남이다. 우리 부모님이 위로 줄줄이 딸만 넷 낳으시고 뒤늦게 아들을 얻으셨으니 할아버지의 외아들인 아버지의 대를 이를 장손인 내가 누나들이나 동생에 비해 특별대우를 받으며 자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일 터였다. 그런 내가 장자권(?)을 포기하고 신학교를 간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지만 아무튼 누나들은 내 나이 어릴 적부터 집을 떠나 살아서 한 번도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였던 기억이 없다. 누나들이 시집가고 내가 신품을 받고 내 동생이 장가를 들 때도 꼭 한 명씩은 빠졌다. (우리 부모님은 남들 다 하는 칠순 팔순, 금혼식 잔치도 안 하셨다.) 그런 우리 여덟 식구가 한명도 빠짐없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있었으니 둘째 누나의 딸인 조카아이 혼인 때였다. 그 역사적 사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관도 아닌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 거실에서 내 카메라로 모두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우리 가족 전체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인,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여다보는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연세에 비해 건강하셨던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여섯 남매와 제수씨, 독일인 매형, 그리고 조카딸 내외가 모두 활짝 웃는 얼굴로 한껏 모양을 내고 있다. 그 다음에도 우리 여섯 남매가 빠짐없이 다 모였던 적이 두 번 더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어머니가 안 계시거나 아버지까지 안 계셔서 뻥 뚫린 구멍으로 찬바람만 휑하니 불 때였다.

설은 여러 가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사는 부모 형제들이 집안의 가장 웃어른을 중심으로 모이는 때다. 우리의 뿌리를 찾아 돌아가는 때다. 가서 부모님의 만수무강과 복을 빌며 세배를 올리는 때다. 그래서 설을 쇠기 위한 거대한 민족 대이동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설날 아침엔 부모님이 사셨던 동생네 집에 가서 차례를 모시고 아이들의 세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는 둘째 누나도 미국 유학 중인 딸한테 가고 셋째 누나는 새살림 차린 아들 며느리와 함께 지낼 터이니 모여서 차례를 모실 사람이 없다. 스스럼없이 지내자고 교우 가정을 성큼 쳐들어가는 용기는 30년이 넘도록 아직도 갖추지 못한 소심한 나다. 부모님 산소에 가서 절하고 가까운 산에나 오를까?

* 독자 여러분과 우리신학연구소를 후원해주시는 고마운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세배를 드립니다. 호인수 배상

호인수 200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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