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지금여기가 추천하는 책-강한]

종종 우리 세대 한국 사람들의 출근길은 너무 멀고 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물론 교통수단이 더 불편하고, 일터와 집의 거리가 더 먼 지역이나 나라도 있을 텐데, 내가 배부른 소리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학 시절, 학교에서 10분 거리에 집이 있는 교수께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거나, 날씨 좋은 저녁때 따님과 함께 산책을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와, 저런 생활은 얼마나 쾌적하고 넉넉할까? 매일 아침저녁, 최소 도합 2시간을 ‘지옥철’에서 끙끙거리거나 어두침침한 광역버스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축복 받은 삶인가?

어느 대선 예비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데, 직장인들이 ‘저녁’을 즐기려면 일하는 시간도 줄여야 하지만, 출퇴근길도 짧아져야 할 것이다. 각자가 돈을 열심히 벌어 일터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는 일 말고 어떤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 자전거나 도보로 출퇴근하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고단한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다. 부족한 잠을 채우기도 하고, 스마트 기기로 재밌는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영상 시대를 맞아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탄하지만, 여전히 손에 신문이나 잡지, 책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제법 보이고, 스마트 기기로 뭔가 읽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1년 넘게 스마트폰을 쓰면서, 기존에 보지 못한 채 하드디스크에 쌓아두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열심히 보고 다녔지만, 그게 지겹고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결국은 출근을 앞두고 책 한 권을 가방에 담게 된다. 지난 1년, 지루하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한 출퇴근길을 함께해 준 서적 동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 중 몇 권을 소개해 드린다.

<코스모스>(특별판), 칼 세이건, 홍승수 역, 사이언스북스, 719쪽, 2006 (에세이)

카잔차키스에 이어 칼 세이건이라니. 여름 휴가에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하는 것 치고는 너무 무겁고 ‘올드’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 취향이 이러한데……. 그래도, 세이건 서거 10주기를 맞아 발간된 <코스모스> 특별판은 신국판 사이즈로 가방에 넣고 다닐 만한 가벼운 재질이다.

<코스모스>의 작가 칼 세이건(1934~1996)은 미국에서 활동한 천체물리학자였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자문위원으로 무인 우주 탐사 계획에 참여했다. 세이건은, 유난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은 공상과학영화 <콘택트>(Contact, 1997년작)의 원작 소설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코스모스>도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자 시도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지구와 비교적 가까운 행성 탐사의 역사, 별의 탄생과 죽음까지……. 나처럼 수학, 과학과 친하지 못해서 애먹었던 사람도 읽을 만한 언어로 적혀 있다. 같은 제목의 13부작 TV 시리즈 <코스모스>와 이 책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다. 생전의 작가가 소탈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 영상물을 곁들여 책을 읽어도 재밌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맑은 날 밤 하늘의 별 구경하는 일을 좋아하면서도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배웠다. 또한, 내가 <코스모스>를 읽기 시작한 때는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거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적 표현 말고는 왜 ‘사회’가 인간을 ‘먹여 살려줘야’ 하는지 나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해 답답하던 때였다. 그러던 내게 <코스모스>는 이 삭막한 우주에서 사람 같은 생명체가 출현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어려운 일인가, 여러 차례, 자세히도 알려 주었다.

<D에게 보낸 편지: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임희근 옮김, 학고재, 92쪽, 2007 (서간)

이번엔 ‘달달한’ 사랑 얘기일까? 지난 겨울,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가 개최한 퀴어아카데미에서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살거나 죽거나’를 주제로 강의한 김영옥 선생의 ‘강추’ 도서다.

2007년 9월 24일, 언론인이자 철학자로서 ‘프랑스의 지성’으로 꼽히던 앙드레 고르는 불치병을 앓던 부인 도린과 함께 파리 교외에 있는 자택에서 나란히 누운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두 사람의 나이는 84세, 83세.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면서, 현대의 돌림병이라고도 할 만한 ‘동반자살’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죽음은 ‘병’이었을까? 이 짧은 책은 죽어가는 아내와의 첫 만남부터 최근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한 통의 편지다. 작가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아내와 더불어 삶을 마무리하기 1년 전에 이 편지를 썼고, 지인들의 권유로 출판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본문 89~90쪽)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임종기 옮김, 문예출판사, 326쪽, 2008 (소설)

우리에게는 목 부위 양쪽에 대못이 박히고, 이마에 바느질 자국이 있는 영화 속 괴물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프랑켄슈타인. 이 소설은 ‘남량특집’이 될 수 있을까? <프랑켄슈타인>이 여성 작가 메리 셸리(1797~1851)의 작품이고, 그가 선구적인 여성주의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문예출판사에서 2008년에 펴낸 이 판본은 1818년판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의 완역본으로,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며 메리 셸리가 의도한 문학에 더 가까운 판본이라고 한다.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자면, 앞서 말한 끔찍한 이미지로만 기억했던 소설 속 ‘괴물’이 인간적이고 이지적인 존재로 등장한다는 것이 새롭다. 오히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존재는,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대해 책임 지지 않고 무조건 파괴하려 드는 ‘인간’ 프랑켄슈타인으로 보였다.

<미사 이야기>, 조학균, 대전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23쪽, 2012 (에세이)

이 책은 휴가객을 위한 가볍고 재밌는 책이기보다는 예비신자나 미사 전례에 관심 많은 신자들을 위한 매뉴얼 정도 되겠다. 예수회 사제로서 로마에서 오랫동안 전례학을 공부한 조학균 베드로 신부가 썼다. <평화신문>에 연재됐던 글을 중심으로 독자들이 쉽고 명확하게 미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까지 첨부해 성당의 구조와 성물을 소개하고 미사의 부분을 이루는 예식의 의미와 기원을 밝힌 후반부에 비하면, 미사에 관한 ‘개론’이라 할 앞부분은 그리 가볍지 않다. 한편 “도대체 천주교는 왜 이렇게 무겁고 우울한 것이냐?” 하는 불평을 꾸준히 들었기 때문일까? “가톨릭교회의 신학은 십자가 신학 혹은 수난 신학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는 저자의 말에 눈길이 간다.

“가톨릭교회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강조는 부활의 의미를 정확하게 체득하기 위한 강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난에 대한 의미의 강조로 인하여 가톨릭 전례가 어둡고 무거운 형태로 인식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에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를 제공하였다.

미사전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관한 배움의 터이며, 신앙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미사전례의 축제에로의 진정한 참여는 미사에 대한 자발적인 의식을 요구하며, 미사전례의 내적인 의미와 외적인 참여에서 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12~13쪽)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박완서, 열림원, 296쪽, 2008 (에세이)

2011년 1월 선종한 박완서 작가(세례명은 정혜 엘리사벳)의 주일 복음 묵상 글을 엮은 책이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서울대교구 주보 ‘말씀의 이삭’ 란에 실렸던 글이라고 한다. 개신교계 고등학교의 쓰라린 기억 때문에 신·구교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지 않은 짝꿍이 먼저 읽고, 작가의 깊고도 솔직한 성찰에 놀랐다며 추천해 주었기에 더욱 특별하게 여겨진다.

서너 페이지를 넘지 않는 쉬운 글을 엮은 책이지만, 의외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되고, 생각에 잠기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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