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벌써 “너나 잘 하세요”하는 핀잔을 듣는 것 같아 귀가 간질간질하다.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주제넘게 시건방진 훈계나 특정 인물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사제생활 32년 째 자그마치 열세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온 나의 시행착오와 잘못들에 대한 뒤늦은 성찰이라고 보아주면 좋겠다. 요즘이 여러 교구의 사제 인사이동 철이다.

내가 처음 보좌신부로 발령받아 주안 성당에 갔을 때는 지금 같지 않았다. 단출하고 가벼웠다. 짐을 옮기는 일은 나 혼자도 충분했다. 그런데 이삿짐을 싸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점 늘어나는 보따리의 양이 지금은 장난이 아니다. 가정 살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웬 잡동사니들이 이렇게 화물차 짐칸에 빈틈이 없도록 빼곡히 쌓이는지...... 1~2년, 심지어는 한 본당의 임기 동안 내내 한 번도 안 쓴 물건들이나 안 펴본 책들이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산더미 같다. 버리자니 아깝고 남 주자니 마땅치도 않은 그저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남 보기에 창피할 정도다.

정확히 짚을 수는 없지만 언제부턴가 이동 명령을 받으면 당연히 전별금을 받을 줄로 여기고 그 액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받을까 남몰래 숫자 끝에 동그라미 하나를 붙였다 뗐다 하기도 했다. 전별금 받아서 낡은 차를 새것으로 바꿨다는 어느 신부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교우들이 내 머리 속을 들여다보았다면 아마 기가 차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게다. 사람이 치사해지는 걸 느꼈다. 어쩌다가 “진세(塵世)를 버리고 이 몸마저 버렸다”고 노래하면서 당당하게 사제가 된 내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 자신이 비참해지고 슬퍼졌다. 그래서다. 나는 작심했다.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다. 사목회에서 구, 반장들을 내세워 ‘자진해서’ 라는 명목으로 전별금 걷는 것을 공식적으로 막았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그래도 섭섭하다며 막무가내로 주머니에 봉투를 찔러주는 몇몇 교우들 외에는 ‘자진해서’ ‘성의껏’ 주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서운하고 허전했음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오늘 점심에 전에 살던 성당에서 여든도 넘은 교우 할머니 한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떡국을 잡수시면서 하시는 말씀, “신부님이 우리 본당을 떠날 때 신자들이 천백만원을 모아 드렸는데 신부님이 안 받고 그냥 가셨다면서요? 아이구, 그렇게 큰돈을 바보 같이 왜 안 받고 그냥 가셨어요?”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 듣느니 처음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그런 일 없다, 준 일도 없고 주겠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니라고 한다고 할머니는 입을 삐쭉이며 눈을 흘겼다. 이상하다. 이제 와서 왜 그런 이야기가 떠돌지? 내가 은연중에 그러길 바랐나? 암만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황금을 돌 같이 보는 사람은 옛날 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최영 장군’밖에는 없다. 돈의 유혹을 거절하기란 죽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우리의 스승께서는 하느님과 돈을 ‘절대로’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죽을 맛이다. 잔머리 굴려서 양다리작전, 나는 그걸 삶의 지혜라고 착각하며 살았구나. 웃겼다.

사족 하나. 나는 성격이 좀 모가 난 편이라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한다. 새로운 본당에 부임해 가면 낯선 교우들이나 사목회 임원들, 심지어는 직원들까지 서로 친해지는 데 남달리 오랜 시간이 걸리며 심하면 크고 작은 오해를 사서 곤욕을 치루는 일이 더러 있었다. 이젠 좀 능숙할 때도 됐으련만 사제생활 30년이 지나도 도무지 노하우라는 게 생기질 않는다. 은퇴할 때까지 계속 이럴 것 같다. 이것 참!

호인수 2008-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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