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녀 제주 강정 공소 회장

“여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닌가 싶어요.”

강정천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정선녀 강정 공소회장이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은어가 유유히 헤엄치는 강정천의 평화로움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을 벗어나 뙤약볕 아래 조용할 날 없는 강정마을이다. 해군기지 공사장 앞 고성이 오가고 눈물이 흐르고 탄식이 흘러나오는, 매일이 전쟁터 같은 삶이지만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지키며 버티는 가운데 그는 “진짜” 하느님 나라를 느꼈다.

▲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앞에 선 정선녀 강정 공소 회장

“요즘 복음에서는 거대한 제국이 작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지만 결국엔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이겨내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그날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하느님의 보상과도 같은 위안을 얻어요.”

9년간의 우도공소 생활 접고 강정마을로
“하느님의 뜻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정선녀 씨는 올해 5월부터 강정마을에 머물고 있다. 그는 “오고 싶었어요”라는 한 마디로 강정마을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이전까지 그는 제주 서쪽에 위치한 섬 우도의 공소회장이었다. 평생 그 곳에서 살 것처럼 땅을 갈아 농사를 짓고 닭과 돼지를 키우면서 9년을 살았다. 농약이나 비료, 제초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1천 평에 땅콩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공소 신자들과 있는 것 나누어 먹고 말씀을 나누면서 깊은 정이 들었다.

“한번은 땅에 굼벵이가 너무 많은 거예요. 굼벵이는 땅콩이 생기자마자 부드러운 껍질에 들어가서 땅콩을 다 먹어버리거든요. 그래서 굼벵이를 없애려고 닭을 키웠잖아요. 결국 닭한테만 좋은 일 했지. 그 덕에 신자들과 좋은 굼벵이 먹은 토종닭 잔치를 여러 번 했지요.”

마지막까지 마음을 붙잡았던 것은 그렇게 일궈놓은 땅과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9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단칼에 마음을 정하고 강정마을에 오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올해 초 안식년을 맞아 프랑스에서 3개월의 휴식을 가진 그는 5월 8일에 한국에 돌아와 다음 날 바로 강우일 주교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강 주교는 정선녀 씨에게 강정마을에 가서 일을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2007년부터 강정마을의 평화를 지향으로 기도를 해왔던 그는 강정으로 향하는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다. 나흘 뒤 강정마을에 들어와 짐을 풀었고, 교구에서 준비 중이던 공소도 2주 뒤에 문을 열었다.

하루 종일 사람이 북적이는 강정 공소   
있어야할 곳에 와 있다는 안심과 확신이 들어


공소가 열린 첫 날 작은자매수녀회 수녀들이 묵은 것을 시작으로 공소는 매일 강정마을을 찾은 수녀들의 휴식 터이자 숙소가 되었다. 정선녀 씨는 “요즘에는 하루에 수녀님 15분도 주무시고 간다”면서 “제일 부자 같은 나날들”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수녀들뿐만 아니라, 공소는 강정마을 주민이 지킴이들을 위해 운영하는 삼거리식당 바로 옆이라는 ‘역세권’에 버금가는 입지조건 덕택인지 하루 종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선녀 씨도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이들을 불러 밥은 먹었냐, 방금 내린 커피 한 잔 해라 사람들을 챙기기 분주하다. 밤에 잠 잘 때를 빼고 하루 종일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공소는 3개월 만에 삼거리식당, 의례회관, 마을회관과 더불어 강정마을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그는 있어야 할 곳에 와있다는 안심과 확신이 든다고 했다. 특히 공사장 정문 앞에서 미사를 드린 후 묵주기도를 할 때 그런 마음이 확고해진다. 오전 11시 공사장 앞에서 봉헌되는 미사 때마다 레미콘 트럭을 내보내겠다는 경찰과 길바닥에 앉아 미사를 드리는 수도자들과 활동가들 사이에 격한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들은 새까맣게 몰려든 경찰에 맞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경찰에 사지가 들려 길가로 밀려난다. 레미콘 트럭이 두 대 정도 공사장 밖으로 빠져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찰은 빠지고 수도자와 활동가들은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채 가쁜 숨을 내쉰다. 그 사이 미사가 끝나고 묵주기도가 시작된다.

“묵주기도 할 때는 모두 다 지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숨을 고르는 때예요. 경찰들도 철수해 나무 그늘 아래에 있고, 용역들도 한 발자국 물러나 있죠.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님의 신비를 묵상할 때마다 그 신비가 구럼비 안에서, 활동가들 마음속에서, 군인과 용역들 속에서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 이런 마음을 성모님이 헤아려주기를 기도해요. 성모님은 어머니잖아요. 어머니인 성모님이 그들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을 못하리라는 법이 없잖아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
성서가 그날 살 만큼의 신념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정선녀 씨도 처음에는 용역과 경찰이 두려웠다. 큰 덩치로 밀고 들어오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겁이 났다. 강정 마을에 온 첫 두 주 동안은 미사에 다녀오면 몸 안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버린 느낌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그는 두려움의 시간들이 “나와 그들 사이에 놓인 시험 문제를 푸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저들은 돈을 숭배하는 사람이고 나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니 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확신을 달라고 기도했다.

▲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앞 미사가 끝난 후 묵주기도를 시작한 정선녀 강정 공소 회장

공사장 정문 미사 강론을 들으면서, 바오로 성서를 필사하면서 두려움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성서가 그날 살 만큼의 신념을 만들어준 것 같다”고 정선녀 씨는 말했다. 이제 그는 용역과 경찰을 사람 그대로로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그는 매일 미사가 끝나면 공사장 정문을 지키는 덩치 큰 용역 바로 앞에 마주하고 앉아 마이크를 들고 묵주기도를 이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선물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제주시 애월읍 작은 마을, 고지식한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정선녀 씨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돈을 벌기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들어간 언니를 따라 시다로 일을 시작했다. 전태일이 풀빵을 사들고 졸음과 배고픔을 참으며 재봉질 하는 소녀들을 찾아다니던 그 시절이었다. 정선녀 씨는 평화시장 2층에 가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볼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린나이에 경험이 없고 실수가 잦아 봉제공장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자 언니 친구의 호적등본을 빌려 미성년자 신분을 속이고 경기도 부천에 있는 전자부품 공장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그와는 다른 이유로 위장취업을 한 노동자들을 만났다.

17살에 언니 따라 상경해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업
폐결핵 요양원에서 만난 ‘사도직협조자’들 통해 성소 발견


그들은 대학을 마치고 공장에 취업한 운동권이었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정선녀 씨는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이 깨치고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폐결핵을 앓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노조 동료는 그에게 경남 김해에 있는 진영성모의원 요양원을 소개해줬다. 6개월이 되면 무조건 퇴원을 해야 하는 국립병원과는 달리 폐결핵에 걸린 가난한 젊은이들을 완치시켜 다시 사회로 내보내는 시설이었다. 요양원의 운영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천주교 사도직협조자인 마리아 하이젠베르크였다.

사도직협조자는 교구장의 공인을 받아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평신도 사도직이다. 수도복이나 외적으로 구별되는 표지 없이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지만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고 독신으로 살며, 약속된 기도생활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여느 수도자의 삶과 본질적으로는 같다. 정선녀 씨는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여러 사도직협조자들이 사회에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곳에서 확실한 가치를 갖고 활동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요양원에서 세례를 받은 그는 사도직협조자들을 보면서 저렇게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었다.

요양원에서 나와 공장으로 돌아가 노동운동을 하던 정선녀 씨는 1년 만에 다시 폐결핵이 재발하자 공장을 그만두고 사도직협조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솔직히는 노동운동을 하며 교회의 보호를 받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종교라는 후원자가 있으면 그나마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던 억압의 시대였다. 여러 수녀 회를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교회의 품에서 살아가되 사회 속에서 전혀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사도직협조자에 매력을 느꼈고, 이 성소가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일요일에는 강정 공소에서 오전 11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제주교구의 첫 사도직협조자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여자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는 1977년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제주도의 첫 사도직협조자가 됐다. 교구에 적당한 양성교육프로그램이 없어 프랑스에서 1981년부터 3년간 교육을 받고 돌아온 그는 골롬반외방선교회가 제주에서 운영하던 한림수직사(현 이시돌 목장)에서 양털의 색깔을 배합하는 일로 사도직협조자 활동을 시작했다. 장애인을 찾아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취미활동을 찾아주는 활동도 겸했다. 1989년 2월에 “공소에 가서 콩 한 쪽도 나눠먹으면서 살아보라”는 주교의 제안을 받아 표선 공소로 발령을 받은 이후 화순과 우도의 공소를 거쳐 지금의 강정공소로 오게 된 거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사도직협조자라는 성소를 소개해줬고, 그들을 따라 살다보니 오늘이 됐네요.”

강정천의 물을 손으로 떠올려 얼굴을 적시면서 정선녀 씨는 또 한 번 활짝 웃었다. 그의 하얗게 센 머리와 햇볕에 검게 탄 손등, 웃는 얼굴을 따라 그려진 주름에 그가 살아온 삶이 있는 그대로 기록되어있었다.

다음 날 오전 공사장 앞 미사에서 다시 만난 그는 미사를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느라 분주했다. 이 날은 육지에서 온 젊은이 30여명이 수도자와 활동가들과 함께 연좌를 한 덕분이었는지 여느 날과 다르게 조용히 미사가 끝났다.

“나를 믿고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산다는 마음을 아침부터 먹지 않으면 휘둘리게 돼요.”

정선녀 씨는 공사장 정문 앞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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