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정록이가 또 가출했다. 세 번째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 가출을 했다. 아침을 먹는데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정록이가 시외버스정류장 매점에서 빵을 훔치다가 잡혔다고 한다. 급히 파출소로 갔다. "우라질 놈!" 욕이 절로 나왔다.

정록이는 성당의 주일학교 중등부 1학년이다. 덩치가 크고 조숙해서인지 또래들과 겉돈다. 가뭄에 콩 나듯 주일학교 미사에 나타나지만 그럴 때마다 녀석이 반갑고 고맙다. 녀석은 그런 내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오늘처럼 사고 친 후 뒤치다꺼리용으로 말이다. 처음엔 녀석의 꼼수가 괘씸했지만 성당 맨 뒷줄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녀석의 뒤통수를 보면 부아가 슬그머니 가라앉곤 한다.

정록이 아버지가 시장통에 있는 다방 주인이라는 것과 재혼했다는 사실은 주일학교 가정방문 때 알았다. 짙은 화장에 야한 옷차림으로 다방 카운터에 앉아 있는 새어머니를 보니 정록이가 정 붙이기에 쉽지 않을것 같았다.

"쌤예, 배고파 죽겠심더." 땟국이 자르르 흐르는 옷소매로 찔끔거리는 눈물을 훔치며 파출소 의자에 앉아 있는 녀석의 첫마디다.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파출소를 나왔다. 아침 햇살 속에서 녀석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다.

"썩을 놈, 와 기어들어 왔노!" 정록이가 집에 들어서자 마자 아버지의 주먹이 불을 뿜는다. "저놈이 가출만 하능기 아임니더. 담배에 본드까지 나쁜 짓만 골라 하는 놈인기라요. 나가 뒈져뿌라!" 아버지는 아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지예." 새어머니도 한마디 거든다. 방구석에 말없이 웅크리고 있는 정록이를 두고 나오는데 발걸음이 무겁다.

두어 달 후 정록이가 퇴학 당할 거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정록이 아버지는 "내사 모르겠심더"다. 며칠 후 정록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쌤예, 배고파서 죽겠심더. 빵 좀 사주이소." 빵 타령을 하는 걸 보니 또 가출이구나. 성질대로 하면 흠씬 두들겨 패 주겠지만 녀석의 꼴이 넝마주이다. 식당에 데려가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는 녀석을 안심시킨 후 가족들과 상의해서 '가출' 아닌 '출가'를 시키겠다고 정색을 하자 녀석은 동그래진 눈으로 "중이 되라는 거라예? 싫어예. 쌤예, 믿어주이소. 집 나가면 쎄가 빠지는데 인제 참아 볼랍니더." 배가 부르자 녀석은 긴장이 풀렸는지 가출담을 신나게 이야기한다. 이때다 싶어 왜 가출했느냐고 속마음을 물었다. "어무이가 하도 보고 싶어서예." 3년 전에 집을 나간 어머니를 찾고 있는 외로운 아들이다.

정록이는 간신히 퇴학을 면했다. 주일학교에도 열심히 나왔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신자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왔다. 녀석이 선생님 '빽'을 믿고 아이들의 돈을 뺏고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녀석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지금까지 성당 밖에서는 말썽을 부렸어도 성당 안에서는 얌전한 아이라고 믿었는데. 배신감이 들었다. "쫓아내야 한다"는 신자들의 성토와 아이들의 쌓였던 불만이 봇물 터지듯이 나왔다. 녀석은 사면초가였다.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정록이와 아이들을 설득해서 저희들끼리 재판을 열기로 했다. 교리실 창밖에서 지켜보니 녀석은 쭈볏거리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당당하게 단상에 서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강경하고 날 선 태도에 조금 주눅이 들었는지 엉거주춤 자세를 고치기 시작한다. 한 아이가 일어서서 녀석의 횡포를 일일이 들춰내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그동안 당한 피해와 고통을 낱낱이 아뢴다. '이놈아,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나는 시원하고 고소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녀석은 기가 죽어 갔다. 죄목이 드러나자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인다.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눈치다.

드디어 긴 재판이 끝나고 정록이에게 선고가 내려졌다. "우리는 정록이의 고름을 짜 주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은 녀석에게 여태껏 저지른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것을 요구했다.그렇게 한다면 아이들도 정록이에게 다시는 나쁜 고름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생전 처음 피해자들에게 맞는 양심의 매 앞에서 녀석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울먹울먹하더니 입을 연다. 더듬더듬 고백이 이어진다. 제법 오래 털어놓는다. 짐작컨대 가출, 도둑질, 본드, 담배리라.

"지가 때리고 돈 뺏고 나쁜 짓을 해서 진짜로 미안했심더." 교리실에 들어가자 눈물범벅이 된 악당의 사과 앞에서 아이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정록이를 보자 나는 웃음이 터지려고 하면서도 눈물이 났다.

얼마 전 주일학교 졸업생들이 반창회를 한다며 나를 초대했다. 앗! 그 옛날, 썩은 고름을 짰던 정록이도 보인다. 완전 어른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서울로 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가요 테이프를 샀다고 내 앞에 쓰윽 내민다. '양희은 노래집'과 '김민기 해금곡집'이다. “쌤예, 이런 노래 좋아하지예?"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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