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사람은 사랑 때문에 미칠 수 있다.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럴 수 있다. 일단 미친 후에는, 광기의 정도가 곧 사랑을 증명할 유일한 척도로 둔갑한다. 더 미쳐야 더 사랑하는 것이 된다.

사랑의 화약 냄새

▲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The Last Circus), 2010년작
사랑이 사랑인 줄 모를 때 아직 즐겁고 유쾌한 어떤 유희일 때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세상의 온갖 공간, 온갖 장소가 ‘놀이동산’으로 변한다. 그러나 일단 사랑이 사랑인 줄 알아 버리고, 원하는 상대와 원대로 되지 않는 고통이 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무 진통제도 듣지 않게 되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더 미치든가, 그만두든가.

사랑에 빠졌으며 감히 그 사랑을 접지도 못하는 미치광이들은 종종 착각한다. 더욱더 미쳐 버려서 궁극에 도달하면 이 광란에서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계속 간다. ‘진정한 사랑’으로 구원 받으리라는 집착만 커진다. 결국 사랑하는 이마저 들여놓지 못할 자기 혼자만의 쳇바퀴에 갇힐지라도, 그게 점점 눈덩이가 되어 마침내 모든 것을 깔아뭉갤지라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만 쳐다보고 있을 때는 다툼은 있어도 전쟁은 없다. 그런데 남자가 눈앞의 여자가 아닌 그 여자 뒤의 ‘다른 남자’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내 사랑을 입증해 보일 대상이 그녀가 아닌 ‘그놈’으로 정해지면 균열이 온다. 증오에 제대로 불이 붙으면 전쟁은 시간문제다. 전쟁이 원하는 것은, 남김 없는 파멸이다. 그러나 전쟁 당사자들은, 자기만은 살아남아 ‘최후의 승자’가 될 거라 확신한다. 보기 싫은 상대만 제거하면 그녀도 세상도 다 내 차지가 될 거라는 망상과 합리화로 폭력에 물든다.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이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처절하다. 마지막까지 관객을 극단의 감정으로 몰고 간다. 슬픈 광대 하비에와 웃긴 광대 세르지오 사이에 놓인 아름다운 곡예사 나탈리아. 저 정신 착란의 무섭고 가여운 세계는 당신과 무관한가? 이 영화를 보고도 여전히, 내전의 역사가 지나간 ‘농담’처럼 보이는가?

‘착한 사랑’의 광기 또한 묽지 않다

명분 없는 전쟁을 본 적 있는가? 전쟁만한 아름다운 명분의 집결지는 없다. 전쟁의 첫 발포가 그렇듯이, 사랑의 광기도 처음에는 망설이지만 갈수록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시작은 다정하고 “안심되는” 착한 사랑일 수 있으나, 일단 광기의 쳇바퀴에 걸려들면 그 왜곡과 일그러짐에 바닥은 없다. 미움의 밀도는 떨어지지 않는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원망과 망상을 아슬아슬 넘나들 뿐이다. 처음에 왜 사랑했는지는 잊은지 오래다.

몹쓸 사랑으로 여자를 괴롭히던 ‘그놈’보다 결과는 낫지 않다. 왜냐하면 광기에 끌려 들어간 이유가 시기심―그놈의 여자, 그놈의 가면, 그놈의 인기에 대한 질투인 탓이다. 단지 부러움에서 그칠 수 없었던 건 오랜 상처여서다. 대대로 웃긴 광대였으나 ‘웃기지 못하는’ 상처와 결핍으로 인한 차선책이었고, 한눈에 반한 나탈리아는 “임자 있는” 몸이었다. 한 수 부족하고 한 발 늦은 인생. ‘그놈’이 쉽게 가진 것을 몰래 부러워나 하는 신세. 마침내 하비에는 자기 부정과 자기 파괴를 통해 “당신을 위해 나도 웃긴 광대가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마침내 자기 자신과 맞바꿔 얻은 가면, 그러나 선망이 깊으면 상대뿐 아니라 자신도 파괴한다. 얻은 것은 “이게 사랑이야?” 하면서 울부짖는 그녀와, 아무도 “안심시켜” 주지 못하는 무서운 얼굴뿐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하는지 모를 죽음의 곡예는 끝날 줄 모르다가, 더는 파괴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갑자기 멎는다. 폐허야말로 진정 눈뜨고 못 볼 ‘현실’이다.

동족상잔, 멎지 않는 피

동족상잔의 내전을 겪은 우리는, 남의 나라 스페인 내전사(內戰史)만큼 우리의 내전사를 모르고 산다. 다만 내전의 참상과 흉터만을 똑똑히 보았을 뿐이다. 왜 일어났는지는 아직도 여러 이유로 선명히 밝히지 못하며, 잿더미 속에서 극복해야 했던 당위만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첫 발포를 막는 것만이 전쟁을 막는 길이다. 일단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예정된 파멸을 향해서만 내닫는다. 그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 아직도 시시때때로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경고하는 이야기다. 적인지 동지인지 아무도 믿을 수 없어 꺼내 보지도 못하고 덧나는 상처. 그게 내전의 통증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슬픈 광대와 웃긴 광대의 비극을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가장 이해 못할 역사를 갖고 있다. ‘미인’으로 상징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지켜 주지 못한 역사는 아프고 아플 뿐이다. 반역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총살’이 연상되는 흉포한 집단 기억에 갇혀 있다. 집단의 상처와 개인의 상처가 한 데 엉겨붙은 ‘전몰자의 묘’는 곳곳에 또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놀이동산의 순간’ 같은 것이 있다. 내전을 겪은 민족은 집단의 동심(童心)이 통째로 파괴되었기에, 부서진 놀이동산의 잔해를 아픈 기억으로 물려받는다. ‘전몰자의 묘’에 ‘남의 얼굴’을 하고 아무리 번듯하게 복원하려 해봤자, 자칫 불행의 연쇄 고리로 더 깊이 빠져드는 이유다. 망상은 언제나 현재가 아닌 과거에 집을 짓는다. 사람보다 화약 냄새를 더 사랑하는 전쟁광들은 그렇게 상처받은 이들의 피와 눈물을 숙주로 자라난다.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