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요한 6,51-58

요한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서기 100년경입니다. 그때 신앙 공동체들은 성찬례를 자기들 방식으로 이미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고, 그 회상한 바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하신 말씀에 따라 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미사에서 하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 전례의 기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유대인들의 항의가 나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유대인들은 성찬을 모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설명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살이라는 단어는 인간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내 형제'를 '내 살'이라 부릅니다. 나와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사셨던 인간관계를 우리도 산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피는 생명입니다(레위 17,11). 따라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말은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살을 우리가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그분이 사람들과 가졌던 관계를 우리도 살고 그분의 생명을 우리도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만나면 고쳐 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을 만나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유대교 기득권층이 죄인이라며 소외 시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실의에 빠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런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확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는 말씀을 발생시켰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과 가졌던 인간관계는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어떤 축복이며 어떤 기쁨인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보존하고, 높이기 위해 다른 생명에 손상을 주는 방식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우리가 잘되는 길을 찾습니다. 우리가 생존 경쟁에서 이기고, 우리가 재물을 더 갖기 위해서라면, 이웃이 입는 피해 같은 것은 괘념치 않습니다. 자기와 자기가 속하는 정당에 유리하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정당이 하는 일을 무조건 폄하하고, 외면하는 우리의 정치 현실이 비참하고 불행한 우리의 인간 조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순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흔히는 그리스도 신앙의 덕목(德目)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느님에게 순종하라고 말하지,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에는 사람에게 하는 순종을 신앙의 덕목인 양 오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유럽 중세 사회에는 대부분의 무식한 사람과 극소수의 유식한 상위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무식한 사람이 유식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무식한 인간의 실효성을 높이는 현명한 처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받고, 각자의 판단으로 취사선택하여 삽니다.

윗사람에게 순종하여 자기의 실효성을 보장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오늘날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뜻을 강요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와 존엄성을 짓밟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는 예수님의 근본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사람은 어떤 구실로도 사람에게 순종 혹은 맹종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생명을 섬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내어 주는 몸이다. 받아먹어라", "쏟는 피다. 받아 마셔라" 하신 말씀은 당신의 삶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성찬을 거행하는 공동체도 그 사실을 알아들었고, 그 말씀은 오늘의 미사에까지 보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예수님의 살이라는 빵을 먹고 예수님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만찬에서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또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당신의 몸이고, 우리를 위한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감사하면, 우리도 그것을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은혜로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면, 그것을 모든 사람을 위한 축복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체성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은혜로운 것도 축복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려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감사할 대상도, 감사할 것도 없는 불행한 생명입니다. 그런 모습들은 사회에도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지향하는 은밀한 추태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미사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무엇을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얻어내는 길이 아닙니다.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것은 이제부터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마시면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마음의 다짐을 합니다.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인간관계와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과 은혜로움을 사람들에게 나눕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 되면서 성찬에서 일어나는 '성변화'는 우리에게도 현실이 됩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