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부활, 성탄 판공성사를 거른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고해성사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근래에 와서는 아예 고해성사 때문에 성당에 못 가겠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수원교구 설문조사에 의하면 자그마치 쉬는 신자의 39.6%가 냉담의 원인을 ‘고해성사가 불편해서’라고 응답했다.(가톨릭신문 11월 25일 자) 내 생각에 고해성사는 오직 천주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인데 이 귀한 보물이 어쩌다가 다들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는지 알 수가 없다.

고해성사는 글자 그대로 고(告)해서 푸는(解) 것이다. 나와 남,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꼬이고 막히게 된 원인이 내게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서 화해를 청하는 성사다. 그리고 그 청을 하느님이 분명히 들어주셨다는 확실한 징표다. 그런 의미에서 전에 고백(告白)성사라고 고쳐 부르던 것(confession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을 다시 고해성사로 바꾼 것은 참 잘 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모든 천주교신자들이 이 보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소중하게 쓸 수 있을까?

<가톨릭교회교리서>는 고해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고백이 아니라 통회(痛悔)라고 가르친다. 통회는 상등(上等)통회와 하등(下等)통회로 구분하고 상등통회를 한 경우에는 고해성사의 형식 절차 없이도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나는 바로 여기에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멀리하는 전염병(?)에 대한 처방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해성사의 성립 요건인 통회, 그중에서도 상등통회를 강조하는 것이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전통적 방식인 사제와의 일대일 ‘개별고백’을 시대가 변해서 신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자신 있게 말하거니와 개별고백을 통해서 얻는 참 맛과 은총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아무리 개별고백의 장점을 강조해도 굳이 싫다고 등 돌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데 있다. 구슬이 서 말이면 뭘 하나?

개별고백이 싫은 사람에게 고해성사는 은총이 아니라 귀찮고 짐스러운 멍에다. 그들은 ‘고해성사 자체’(통회)가 싫은 게 아니라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사제 앞에 가서 미주알고주알 고해바치는 게(고백) 시쳇말로 쪽팔리고 싫은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감안하고 배려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급기야는 냉담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설령 가족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고해소까지 끌려 왔다 치자. 그게 무슨 소용인가? 오랫동안 신자들의 고백을 들어본 사제는 고해소 휘장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가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는 말인지 습관적으로 마지못해 하는 말인지 환히 다 안다.

어차피 ‘최선’이 많은 이에게 외면당하는 판이라면 차선책이라도 써보자. 고해소엔 안 들어가도 진심으로 통회하는 마음은 갖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의 공동참회예절(또는 공동고백)이 그것이다. 교회의 웃어른들은 그것은 사제가 저 편하자고 잔머리 굴리는 짓이라고, 신자들에게 못된 습관만 들이고 성사를 속되게 하는 짓이라고 나무라신다. 그러나 어쩌랴? 공동참회예절을 기다려 성당이 꽉 차게 몰려오는 젊은이들을! 그러니 마냥 고집만 부리실 일이 아니다. 이제는 사제가 마치 외도하는 것처럼 사방 눈치봐가며 할 게 아니라 떳떳하게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게 어떨까? 그것이 성에 안 차는 사람은 따로 개별고백을 하면 될 일이다. 당연히 고해소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판공성사의 계절이다.

호인수 200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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