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주말영화] <대학살의 신>, 로만 폴란스키 감독, 8월16일 개봉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새 영화 <대학살의 신>은 야스미나 레자의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연극 <대학살의 신>은 파리에 사는 두 상류층 커플의 치고 받는 대화 난장판으로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토니워어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대한민국연극대상을 수상한 화제작이다. 원작이 워낙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 관객을 흡인하는 에너지가 크기 때문에 거장 폴란스키가 자신의 경력에 비추어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것에 뭐 그리 큰 이점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로만 폴란스키는 폴란드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유태인 감독으로 그 자신의 삶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람이다. 부모가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사망했고 자신은 그곳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원래는 코미디언을 지망하다가 폴란드 우츠국립영화학교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연출자가 되었으며 1960년대 정치적인 풍자 코미디로 사회를 빗대었던 폴란드 뉴웨이브시네마를 이끈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이다. <물 속의 칼>(1962), <혐오>(1965), <막다른 골목>(1966) 등 폴란드와 프랑스 시절의 그의 초기 작품들은 고립된 공간에 처한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광기를 우스꽝스럽게 보여주었으며, 이는 억압된 사회를 교묘하고도 날카롭게 비꼬는 코미디 미학의 본질을 담고 있었다.

그가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만든 <악마의 씨>(1968)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악마의 아기를 잉태하고 세상에 악을 퍼뜨리게 된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로 신이 통치하는 세상의 어지러운 카오스를 표현한 영화다. 그는 이 안티그리스도교적인 영화를 이유로 광신도 집단인 찰슨 맨슨 교도에 의해 임신한 아내가 무차별 난도질되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는다. 뉴아메리칸시네마 시대의 절정기에 탄생한 <차이나타운>(1974)은 진정한 네오누아르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고, 그는 이후 모델을 지망했던 미성년 소녀와의 성 추문으로 인해 미국에서 쫓겨 나와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를 전전하는 유목민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간간히 작품을 발표하긴 했지만 <피아니스트>(2002)로 깐느영화제 대상과 아카데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재기를 하는듯했다. 하지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2009년 취리히영화제에서 수여하는 평생공로상을 받기 위해 가던 중 스위스 공항에서 체포되어 30여 년 간의 긴 도피생활을 마감, 지난해에 가택연금상태에서 해제되었다.

폴란스키 하면 따라오는 단어들, 가스실에서의 탈출, 광신도 집단에 의해 난자 당한 아내, 미성년자 성 스캔들, 도피와 체포 등, 이 단어들을 생각하면 그가 하필이면 꽉 막힌 폐쇄된 공간 안에 갇힌 인간들의 광기 어린 본성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에 적은 영화들뿐 아니라 <세입자>(1977), <시드니 위버의 진실>(1994),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유령작가>(2009) 역시 한정된 공간 안에 갇힌 자들이 벌이는 힘의 관계를 보여주고 현대인의 위선과 거짓을 들춘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자가 받아야 했던 인종적 수모,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추문과 비난, 망명과 도피, 체포 등 끝없는 상처는 그의 영화 속에 반영되어 나타났고, 그의 영화는 더 폐쇄적이고 더 지독하고 더 광기 어려졌다. 그리고 작년 연금상태에서 해제되어 만든 영화가 <대학살의 신>이다.

이 영화에는 4명의 주인공들만 등장한다. 아들들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만난 두 부부다. 때린 아이 재커리의 부모 낸시(케이트 윈슬렛)와 앨런(크리스토프 왈츠), 몽둥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아이 이턴의 부모 페넬로피(조디 포스터)와 마이클(존 C. 라일리)이 그들이다. 이 4명의 배우들은 모두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배우상을 수상한 관록의 연기파 배우들이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바뀌었고, 뉴욕의 전형적인 성공한 중년부부로 캐릭터를 구성하였으나, 폴란스키는 미국으로 입국할 수 없는 상황, 이들 4명은 감독과 의기투합하여 뉴욕 배경의 영화를 파리에서 촬영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이 영화의 배경이 어디인지는 상관이 없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딱 들어맞는 이야기인 걸 봐서는.

페넬로피와 마이클 부부, 낸시와 앨런 부부는 페넬로피 마이클네 고급 아파트 거실에서 아이들의 싸움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모였다. 우아하고 교양 있으며 합리적이고 지적인 이들이 상대 아이들을 관용으로 이해하고 아들들만의 원만한 친교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한다. 아파트 복도에서 그들은 사소한 것들로 서로 신경을 긁고 다시 거실로 들어와 대화를 나누기로 한다. 타협과 중재를 위한 대화를 가장하지만, 실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잘 나가는 로펌 변호사인 앨런은 대화 도중 수시로 핸드폰을 들고 거대 제약업체가 나약한 환자들을 상대로 승소할 작전을 짜는 통화를 해서 자유주의자 페넬로피의 신경을 거스른다. 마이클은 아이들이 키우던 햄스터를 하수구에 놓아주었다는 사소한 모험담을 발설함으로써 교양 있는 낸시의 경멸을 키운다. 이제 아이들의 싸움은 부차적인 문제고 두 부부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 대결이 시작된다.

페넬로피 부부가 대접한 디저트를 먹은 후 이어지는 날 선 비꼬기 대화 도중 낸시가 엄청난 양의 구토를 하고, 페넬로피는 자신의 지성을 과시할 후지타, 베이컨의 화보만이 걱정이며, 앨런은 더러워진 명품 양복에만 신경이 가 있다. 그 다음은 마이클의 스카치 위스키이다. 자유롭고 지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아내와 살면서 존 웨인을 존경하는 마초맨의 심성을 숨겨야 했던 그의 울분이 터져 나오고, 낸시는 하루 종일 핸드폰과 사는 성공한 남편의 무매너에 폭언을 가한다.

진보적인 지식인을 자처하는 페넬로피가 꼴 보기 싫은 월 스트리트 우파 앨런과, 돈과 사기질에만 능할 것 같은 성공한 인텔리 앨런이 꼴 보기 싫은 자유주의자 페넬로피. 교양 있는 척 하는 낸시의 미소 뒤에 가린 위선을 꼬집는 마이클과, 무식하고 투박하면서도 인자한 척 하는 마이클을 공격하는 낸시. 알코올이 들어간 두 부부는 계속해서 편이 뒤바뀌며 쉴새 없이 공격하고 비꼬고 진상을 부린다.  

혹자는 폴란스키의 영화버전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연극을 영화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이전 걸작들에 비해 너무 소품이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 잘 만들어진 연극을 다른 매체로 잘 옮기기 위해서는 원작의 힘 위에 감독의 연출 능력이 필수다. 폴란스키는 단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80분의 짧은 난투극을 위해 미장센을 디테일 하게 배치하고 카메라 앵글을 정성스레 고안한다. 4명 캐릭터들의 힘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는 360도 공간을 모두 활용하고, 거실의 거울을 통해 한정된 공간은 확장된다. 카메라 앞에 있지 않은 거울 속 인물들의 반응샷까지 꼼꼼하게 계산하고, 영화는 거실과 화장실, 부엌을 유연하게 오가며 시시때때로 변하는 편먹기와 편가르기를 공간에 대입한다.

연기파 배우 4명의 앙상블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존경받는 조디 포스터 페르소나를 마구 비틀어대는 폴란스키의 블랙유머는 얼마나 재밌는지… 영화 속 앨런의 제인 폰다 유머는 정말로 유쾌하며, 자신의 이미지를 비틀어서 마구 망가지는 캐릭터를 흔쾌히 연기하는 조디 포스터도 반갑다. 존 C. 라일리는 특유의 냉소적인 코미디 연기를 해내며, 우아한 미소 속에 감추어진 치졸함을 드러내는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혀를 내두른다. 최근 영화의 러닝타임에 비해서는 너무 짧지만 경제적이고 강력한 80분 내내 리듬감과 서스펜스가 팽팽히 유지되고, 영화는 최후의 순간까지 관객을 몰입하게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팡 하고 폭발한다. 하수구에 버린 햄스터는 어디로 갔을까? 다투었던 아이들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나? 이 모든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너무도 반가웠던 가장 큰 이유는 80세를 바라보는 영원한 악동 폴란스키가 이제 초기 자신의 장기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힘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우습고 부조리한 상황들, 그리고 리듬감 있게 펼쳐지는 착착 감기는 대사를 통해 확보된 서스펜스. 울랄라! 더 이상 <차이나타운>과 <피아니스트> 같은 대작을 기대하지 않고서 좀더 자주 소품 같은 귀엽고 신랄한 코미디를 만들어주기를. 그게 1960년대 뜨거운 청년의 시대를 살았던, 이제는 노인이 된 감독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인 것 같다.영화 역사상 가장 젊은 시대인 1960-70년대를 이끌었던 감독들의 작품은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할 것이다. 젊은 날을 뜨겁게 살았던 그들에 대한 우리 후배 세대의 작은 보답이다.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알렌, 테렌스 맬릭, 마이크 니콜스, 아녜스 바르다, 밀로스 포만,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그,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늙어서도 청년인 이들 감독들의 신작을 만날 일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동국대, 수원대 출강 중.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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