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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비기독교인도 소통할 수 있는 품 넓은 영화제 되길제5회 기독교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 이신정

   

대학로 일대의 동숭교회와 하이퍼텍나다, 대학로 문화공간 엘림홀에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주제로 지난 10월 1일부터 5일간 [5회 서울 기독교영화제]가 열렸다. “신앙은 현실의 절망을 넘어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계를 함께 긍정하는 힘이며, 곤고한 시대를 살지만 모든 비극과 고통을 넘어 새로운 창조질서가 구현되는 희망 속에서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과 긍정의 감탄사를 현실의 영화 속에서 발견”하려는 노력이며, 더불어 “보이지 않는 것을 봄으로 상대를 새롭게 알고 새롭게 관계 맺는 일”이라고 영화제는 밝히고 있다. 제대로 된 영화제가 전무한 가톨릭교회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지난 5년 동안 계속된 기독교영화제에서 우리 교회가 필요한 자극을 받기를 희망하면서 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일한 이신정 선생을 만나 인터뷰하였다.

서울기독교영화제의 취지와 과정, 드러난 고민은 무엇인가요?


영화제의 우선적인 취지는 기독교 안에 포진된 수많은 다양성과 차이들을 활성화하려는 것입니다. 영화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 묻고, 기독교를 통해 다시 영화에 대해 묻는, 지난하지만 의미 있는 대화의 과정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화에 대해 무심한 기독교인들이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기독교에 대해 이미 판단을 종결해 버리거나 생각을 묻어 버린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다시 사유하는 새로운 공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내부의 보수와 진보가 만나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이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폭 넓은 대화의 공간이자 사유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대화는 개인의 확장이자 세계의 확장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통해 기독교의 품이 더 넓어지고, 기독교를 통해 영화의 내면이 더욱 심화되는 변화의 물길 또한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문제는 기독교영화라는 개념에 대한 혼란이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객은 물론, 준비하는 이들조차도 도대체 기독교영화란 무엇인가? 기독교영화제가 왜 필요한가? 라는 원칙적인 문제들을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이라는 표현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의 문제가 결국 영화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겠지요. 무엇을 기독교적이라고 믿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물론 문제는 아직도 산적해 있습니다. 우선 아직도 구체적인 홍보가 부족해서 큰 교회들조차도 이런 영화제가 있다는 걸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더 알리고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서 같은 신앙을 갖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얼마나 같으면서도 다른지, 그 차이를 확인하면서 그 차이로부터 배우는 과정이 되길 바랍니다. 뿐더러 국내든 해외든 기독교영화다운 기독교영화가 별로 제작되지 않는 탓에 상영작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비기독교인 제작자들로부터 영화를 수급받을 때는 협의의 선교영화제가 아니냐는 오해부터 풀어야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좁은 의미의 선교영화가 아니라 신학적인 질문을 내장한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많이 상영하는 게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편영화 초대전에서는 제작된 지 오래된 것이든 최신 작품이든 상관없이 기독교인들이 보면 좋겠다고 여겨지거나, 비기독교인들이 봐도 낯설지 않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을 선정하려고 애썼습니다. 또한 단편영화 경선부문은 기독교적 코드를 의식하지 않고 만들었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영화라면 참여할 수 있게 문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영화제가 단지 영화를 수용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생산하는 차원에서도 기여하기 위해 사전제작지원작을 공모해서 기독교영화다운 기독교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제작비를 후원하는 사업도 벌이고 있습니다. 지난해까지는 한 작품에 2천만 원의 제작비를 지원했는데, 올해에는 일반영화 부문과 기독교영화 부문을 구분해서 1천만 원씩 나누어 지원하는 방식으로 공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섹션을 구분했더니, 일반영화 부문보다 기독교영화 부문의 지원작 수준이 확실히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주 시사적인 문제지요. 보통 기독교를 전면에 내세우면 관습적 금기에 빠져서 복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신앙적 고민을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자유로운 상상력을 동원하기 힘든 것 같아요. 자기 안에 내장된 다양한 질문들, 다양한 신앙적 딜레마들에 대해 교회에서 주는 단순한 해답만 받아먹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죠. 신앙이 내 안에 새로운 질문을 야기하는 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좁은 시각에 갇혀서 현실의 삶이 주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대답으로 풀려고 하고, 결국 영화적 상상력마저도 일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꾸 만들도록 격려하다보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것이고, 그게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키에슬롭스키의 <십계> 10부작 시리즈 같은 경우가 좋은 선례가 될 것 같습니다. 십계명의 각 계명들을 영화제목으로 삼고 있지만, 내용은 보통 사람들이 삶에서 부딪치는 윤리적 문제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쯤 부딪칠 법한 보편적인 주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이런 작품이야말로 종교적 깊이와 현실적 품을 두루 갖춘 제대로 된 기독교영화라고 봅니다. 우리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흥행에 대한 강박관념 없이 맘껏 영화적 사유를 펼쳐서 교회나 성당 같은 신앙공동체가 함께 보고 함께 토론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통한 상호소통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주시지요.

개인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기도 하면서 영화가 아주 의미있는 사회적 소통의 매개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활자나 말로 접하면 진부할 수 있는 주제도 영화의 캐릭터나 이야기를 통해 표현된 영상으로 보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생겨서 서로 다른 입장을 아우르는 효과를 얻게 됩니다. 진보든 보수든, 성이나 계급, 연령,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겸손하게 배울 것이 많음을 느낍니다. 대화도 하기 전에 상대방에 대해 판단을 내려 버린 적이 많다는 걸 깨닫기도 하면서 말이죠. 만나서 대화하기 전에 판단해 버리는 건 교만한 일입니다.

영화란 관객들이 각자 자기가 처한 맥락에 따라 나름의 의미를 챙겨가는 텍스트입니다. 보수적인 사람들도 와서 보고 눈물을 흘리고, 급진적인 사람들도 자기 생각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도 하지요. 진보적인 사람들은 보통 이성적 사유와 성찰기제로 무장된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의외로 외롭게 게토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언제나 감성과 이성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면서 그 폭이 넓어지는 거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영화는 신앙인에게 깊은 사유와 성찰과 감동과 재미를 두루 던져줄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특성이야말로 서로 다른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주로 개(個)교회 안에 갇혀 있어서 어떤 목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내용이 좌우되기 쉽습니다. 목사의 설교 내용과 신학적 입장을 평신도가 뛰어넘을 수 없는 거죠. 대체로 교회에서 신앙적 질문과 대답의 범주를 정해주고 훈련시키면 신도들은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다른 신학적 입장이나 견해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어 있습니다. 올해 기독교영화제 사전 부대행사로 ‘기독교영화 비평교실’을 두 번째로 열었는데, 참여한 이들이 다양한 영화들을 매개로 여러 신학자들과 만나 평소 품고 있던 신학적 질문들을 맘껏 제기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교회 안에서는 접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행사는 작년부터 시작한 것인데, 여간해선 신도대중과 만나기 어려운 강단신학자들이나 진보적 신학자들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기독교인들과 만나 저들의 갈증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죠. 어찌 보면 서로 고립되어 있지만 서로가 만남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왜 영화에 주목하나요?

좋은 영화는 어떤 설교 못지않은 감동을 줍니다. 가슴에 깊은 울림도 주지요. 활자 이전 시대의 예배행위는 아주 공감각적인 것이었지요. 신앙적 감수성은 활자를 통해서만은 도저히 풍성해질 수가 없어요. 이성적 성찰도 중요하지만 피부로 느끼고 가슴으로 진동해야 합니다. 근대성 속에서 종교가 계몽주의와 결합하면서 활자매체를 통한 복음전도, 복음해석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지요. 이 때 복음을 누가 해석하고 누가 전달, 보급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영화에서도 누가 카메라를 들고 있느냐가 조작의 핵심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미디어를 누가 조작하는가, 하는 질문이 중요하듯이, 우리 신앙을 누가 통제하고 누가 해석한 것을 받아먹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반 교인들은 그런 질문을 던지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누군가 해석해 준 내용에 대해서 순종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여지만 주어지기 때문이죠.

성경에 대한 특정한 해석, 특정한 가르침을 통해 누가 힘을 얻는가, 누가 이득을 얻는가, 하는 것은 무서운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들은 원천적으로 교회 안에서 금기시되고, 그래서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상상력이 고갈되고, 자연스레 다양한 금기들이 내재화되게 됩니다. ‘난, 예수가 이런 분이었던 것 같아, 이 말씀은 이런 뜻인 것 같아, 그러니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갈래’ 하는 생각과 실천의 자유가 줄어들고, 일정한 금기 속에 관습적인 사고, 관습적인 신앙적 실천만 하게 되는 거죠.

영화를 통해 새로운 신앙적 질문과 맞닥뜨리는 건 그런 의미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다른 방식의 접근,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기 때문이죠. 현실적으로 기독교영화가 창의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통제 불가능성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안전선 안에서만 사고하도록 하니까, 기껏 교회에서 선교영상, 선교영화라고 만들어 놓아도 비기독교인과는 소통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죠. 정해진 교리, 정해진 신앙적 고민을 마치 받아쓰기 하듯이 영상에 담는다고 할까, 그런 거죠. 말로 다 할 수 있는 것을 영화로 만들면 전복적 상상력이 나오질 않습니다. 사실 예수께서 살아생전 청중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은 당대 현실의 부당한 질서를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들이었는데 말이죠. 물론 일상적이고 친근한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말입니다. 기독교영화야말로 그런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메시지를 품고 있지만, 말을 거는 방식은 친근하면서 부드러운 것, 다가가기 쉬운 것, 경계를 넘나드는 것, 그런 방식 말입니다.

   

▲이도윤 감독 <이웃>

한편으로 영화를 통해 교회가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기도 해야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것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잘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비난을 일삼는 안티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참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비판은 앎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죠. 비판과 소통은 언제나 같이 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중영화 속에서 기독교가 부정적으로만 그려지는 걸 보면, 한 편으로는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저게 전부가 아닌데, 하는 아쉬움도 갖습니다. 일부만 보고 전부라고 판단하는 오해와 교만이 보이기 때문이죠. 문제는 건강한 신앙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안 나서려고 한다는데 있습니다. 굳이 내세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표현 수단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장애인들, 이주노동자들, 미혼모들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을 배려하면서 돌보는 기관들 가운데 기독교의 후원을 받는 곳이 참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익명의 기독교인들이 흘린 땀과 헌신, 봉사, 그 힘이 이 사회의 일각을 받치고 있거든요. 대중매체는 언제나 선정성을 먹이로 삼습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전부라고 판단하는 거죠. 한국교회가 잘 못하고 있는 부분은 물론 반성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들어서 다양한 시민적 연대를 꾸리도록 하는 것도 영화를 통한 기독교적 소통의 한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은 사유가 녹아 있는 좋은 영화는 어느 순간 존재를 울리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은 결코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신앙적 감수성은 결국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며, 신앙의 윤리는 기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기독교영화가 어떤 문제를 붙잡고 고민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동화처럼 아름답고 순결한 영화도 소중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붙잡고 신앙적 사유를 펼치는 영화도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좋은 기독교영화라고 추천할 만한 작품이 있다면?

글쎄요. 워낙 기독교영화라는 범주에 넣을 만한 영화들이 빈곤해서 추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신앙이 보수적이다, 진보적이다를 떠나서 두루 감동과 문제의식을 전했던 작품으로 <미션>이란 영화를 들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진보진영, 보수진영을 망라해서 적잖은 호소력을 가졌었죠. 식민지배에 얽힌 정치질서와 종교가 어떻게 결탁하는지를 보여주는데, 사실 그건 그 시대의 문제만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신앙과 영성이 아름다운 음악과 더불어 어떻게 사람의 가슴을 울릴 수 있고 어떻게 온 생명이 연대하는 예배로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죠. 즉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차원을 거의 모두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한상봉 2007.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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