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산책길을 나서는 것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반복되는 나의 일과다. 그 날도 성당을 나와 차들이 빽빽이 들어선 연립주택 골목을 지나던 참이었다.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들 셋이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들고 재잘거리며 저만치서 나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 앞까지 온 아이들은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했다. 기특하기도 하지. 얼굴은 낯설지만 으레 우리 성당에 다니는 아이들이려니 하며 나도 반갑게 손을 흔들고 지나쳤다.

몇 발짝을 가다가 나는 등 뒤에서 “할아버지!”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머리만 조금 하얗다 뿐이지 내가 어디 할아버지 같은가? 당연히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할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뭔가 이상해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 나를 부르는 소리구나! 조금 전에 내 곁을 지나갔던 아이들 셋이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를 불렀니?”

듣기는 매우 거북했지만 내가 어째서 할아버지냐고 아이들과 시비할 일도 아니잖은가.

“그럼요. 여기 할아버지 말고 또 누가 있어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그 아이들은 우리 성당 주일학교 아이들은 분명 아니었다. 한 아이가 나서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말했다.

“할아버지, 가만히 보니까 무척 외로워 보이시는데 이거 드릴 테니 가져가세요.”

갑자기 머리가 전봇대에 세게 부딪힌 것처럼 띵~했다. 아니, 외로워 보이다니! 이게 무슨 소리? 그 아이는 제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 물병을 조심스레 내게 건넸다. 목 부분을 아무렇게나 잘라낸 뿌연 병에는 작은 금붕어 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 엉겁결에 병을 받아든 내게 아이는 열심히 설명을 해댔다.

“학교 앞에서 파는 거 샀는데요, 금붕어 밥은 수족관이나 백화점에 가시면 살 수 있으니까 잘 기르시고 친구하세요.”

나는 금붕어 병을 들고 동네를 벗어나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혼자 사는 외로운 늙은이? 얼마나 불쌍하고 궁상맞게 보였으면 초등학교 아이가 제 용돈을 털어 산 아까운 금붕어를 선뜻 건넸을까? 내 꼴이 지나가는 아이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렇게 초라하고 꾀죄죄한가? 그래, 설사 그렇게 보였다고 치자.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처음 보는 초등학교 3,4학년의 어린 애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저 애들은 외로움이 뭔지 알기나 할까? 아니면 혹시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 속의 외로움이 아이들 눈에 들킨 것?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금붕어를 큰 대접에 옮겨 담고 먹이를 사다가 넣어주었다. 저것들이 잘 살까? 아이들의 예쁜 마음을 봐서라도 금붕어들은 내 곁에서 오래오래 잘 놀아줘야 했다.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나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나는 금붕어 두 마리가 대접 위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바로 어항을 사다가 산소발생기라도 넣어줬어야 했는데 미처 그 생각을 못한 거다.

금붕어보다 아이들에게 먼저 미안했다. 금붕어가 죽은 줄 알면 얼마나 섭섭해 할까? 그 아이들을 다시 보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이 할아버지(?)한테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할까? 그러면 아이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금방 새 금붕어를 가져다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다시는 더 그 골목길에서 그 아이들을 마주치지 못했다. 얼굴도 기억이 안 나니 다시 만나기는 다 틀렸다. 어느 학교 몇 학년, 이름이라도 알아둘 걸... 도대체 나도 남들과 똑같이 차츰 할아버지가 되어간다는 엄연한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발버둥치는 이 한심한 작태를 새삼 돌아보게 해준 그 천사들은 누구일까? 곱게 늙는 법을 익혀야겠다고 다짐하게 한.

호인수 200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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