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지금여기가 추천하는 책-한수진]

"책도 좀 읽고 그래야 하는데 읽을 시간이 없네. 이게 사는 건가." 책 이야기만 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쉰다.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초딩 때부터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지만, 살다 보면 손에 책을 쥐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여유를 부리는 것이 어디 그리 쉽던가. 출퇴근길 차 안에서라도 책을 읽어야지 하고 야심 차게 가방 무게를 늘려 보지만 버스를 타면 자리가 없고, 서서 보자니 버스는 흔들리고, 퇴근 시간엔 반주로 걸친 술기운에 가방에 책을 넣었다는 기억조차 사라지고 만다. 책장에는 읽지도 않았는데 때가 타 버린 책들이 쌓여 간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책을 손에 쥐게 되는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게 됐다. 갑자기 약속이 취소돼 여유가 생긴 저녁 시간, 일 때문에 읽어야만 하는 책이 주어졌을 때, 혹은 뜻밖의 책 선물. 시간과 장소, 그에 어울리는 책, 이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얻을 수 있는 책을 읽을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르기에 더 기다려지고 소중하다. 그렇게 갑자기 마주했지만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했던 책 네 권을 소개한다.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김동성 그림, 문학동네, 192쪽, 2009 (소설)

주인공 장이는 책을 베껴 쓰는 필사쟁이의 아들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천주학 책을 필사했다는 이유로 관에 끌려가 매를 맞고 죽자 장이는 아버지를 고용했던 책방 주인 최서쾌의 양자로 입양돼 책방 심부름꾼 생활을 시작한다. 이야기책을 좋아하는 미적 아씨와 집안 가득 책을 수집하는 홍교리 등 책을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성장하는 장이의 이야기가 김동성 작가의 한국적 색채 가득한 삽화와 함께 펼쳐진다. 보름달이 뜬 밤 정자에 모여 이야기 연회를 여는 장면은, 비록 책 속의 계절은 봄이지만 한여름 밤의 꿈처럼 로맨틱하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등을 대고 누워 시간을 초월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책이다.

"책을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두고 아껴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해서 권해주는 책을 한권, 두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가을부터 준비하듯 나도 책을 차곡차곡 모아놓으면 당장 다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 마이클 예이츠, 추선영 역, 이후, 426쪽, 2008 (에세이)

32년간의 대학 교수 생활을 정리하고 부인과 함께 5년간 국립공원과 모텔을 돌며 노동자의 삶을 경험한 경제학자의 여행기이자 체험기. 단순한 '체험 삶의 현장'이 아닌, 사회 제일 아래 계층이 겪는 차별과 불평등을 온몸으로 느끼며 노동자들의 일상을 세세히 기록했다. 10년 전의 여행기지만,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 국가만 다를 뿐, 자본주의 사회에서 밑바닥의 삶이란 마치 도플갱어와 같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의 경제적 환경과 그들이 모시는 사람들의 경제적 환경 사이의 간극은 막대해져 점점 더 커져간다. 나이든 중산층 주민들은 잭슨 같은 마을이 겪고 있는 변화를 초래한 일차적인 요인인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채, 주로 이주노동자들을 상대로 분노를 표출한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마르코스, 박정훈 역, 현실문화, 288쪽, 2008 (소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1994년까지 멕시코의 깊은 산에 살았던 마야인 농민이다. 도시에서 온 젊은 게릴라 마르코스는 옥수수 잎을 말아 만든 담배 연기와 함께 나타난 안토니오 할아버지에게서 마야 조상들의 지혜를 배운다. 옥수수로 인간을 만든 신, 해와 달의 탄생 등 세상이 만들어진 이야기부터 사람은 왜 꿈을 꾸어야 하고 적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등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르침이 할아버지의 "진실한 언어"를 통해 전해진다. 동양에서 태어나 서양의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남아메리카 대륙의 세계관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탈무드에 뒤지지 않을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지혜가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르쳐 준다.

"그런데도 두더지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 계속 자기 안만 들여다보기 때문이지. 바로 그 때문에 두더지는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네. 더불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 역시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기 때문에 사자의 힘을 보지 않고, 자기 마음이 지닌 힘을 본다네. 그래서 사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사자도 사람들을 보지만, 사자는 사람들이 보는 대로 자기를 보게 된다네. 사람들의 시야 속에 있는 자기를 보게 된다네. 그리하여 사자는 자신이 한 마리 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네. 사자는 사람들이 보는 대로 자기를 생각하고는 공포에 사로잡혀 이내 도망치게 된다네."

<차이니즈 봉봉클럽> 조경규, 씨네21북스, 232쪽, 2012 (2008년 출간 개정판) (만화)

하루 한 끼는 중화 풍으로! 등장인물과 줄거리는 두 번째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청송 고등학교의 비밀 동아리인 '차이니즈 봉봉클럽'의 멤버들이 아닌, 그들이 하루 한끼 먹는 중국음식들이다. 페이지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만두와 새콤달콤하고 쫄깃한 꿔바로우, 계란 장조림을 곁들인 독특한 대만식 돈까스에 고명으로 들어간 완두콩마저 탱글한 마파두부가 한상 가득 차려지면 세상만사 거칠 것이 없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등장하는 중국음식점이 서울 곳곳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거다. 책에 나오는 중국집을 모두 섭렵하는 것이 2008년의 계획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다. 2012년 여름, 차봉클럽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며 여름 휴가의 첫 끼는 반드시 중화풍으로 할 것을 다짐한다. 찜통 같은 더위에 지쳤으니 살얼음 사각거리는 차가운 중화냉면을 후루룩후루룩 먹어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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