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그만의 정원> 사이라 샤 지음, 유은영 옮김, 한겨레신문사, 2004

뉴스에서 그곳은 언제나 거칠고 황폐했다. 자살 폭탄 테러로 혹은 점령군의 발포로 수십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나라. 종교를 내세워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석불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킨 나라. 오랜 전쟁으로 평균 기대 수명이 50세가 채 되지 않는 나라. 저 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 암울한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나는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비추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의 진짜 모습이 궁금했다.

그러나 한번도 아프가니스탄에 직접 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거리가 멀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은 핑계였다. 한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가로 분류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 역시 핑계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글과 영상으로만 봤던 전쟁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한번도 접해 보지 못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어찌 보면, 아프가니스탄은 거리상으로 유럽보다 가깝고, 사람들 생김새도 유럽인에 비하면 한국인과 비슷한데 마음의 거리는 어느 별나라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난
프리랜서 기자 사이라 샤의 여행기 <파그만의 정원>

마음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접어 둔 어느 날 책장에서 <파그만의 정원>을 발견했다. 장미꽃 뒤로 터번을 두른 남성들이 경계의 눈빛을 보이는 갈색 표지를 넘기며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이야기에 단번에 빨려 들어갔다. 글이 말하는 대로 물방울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며 솟구치는 분수대와 과실수에 앉아 노래하는 온갖 빛깔의 새들을 머릿속에 그렸다. 즙이 가득한 멜론과 갖가지 향신료가 침샘을 자극하는 필라우(쌀에 고기와 야채를 넣어 기름에 볶은 후 육수를 넣어 지은 밥)의 맛을 느꼈다. 물이 흐르는 골짜기와 과수원을 지나면 보석처럼 빛나는 도시, 카불이 손에 잡힐 듯 반짝인다.

그런데 이내 꿈같은 파그만(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근교에 위치한 소도시)의 정원을 빠져나와 2001년 4월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향하는 도로를 지나는 택시 안,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르카를 뒤집어쓰고 숨이 막힐 듯 답답함을 전한다. 부르카를 걷어 얼굴을 내보이거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형벌에 처해질 수 있는 극단주의적인 탈레반 정권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도로 위에서 작가는 자신을 소개한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온 서른여섯 살 여성 기자 사이라 샤.

사이라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마호메트 예언자의 딸 파티마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프가니스탄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사리아와 동생들에게 항상 고향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파그만 사람들은 수도 카불을 카불 잔(Kabul jan)이라 불렀다. 사랑하는 도시 카불. 우리 또한 카불을 그렇게 불렀다. 카불은 우리가 속한 곳이기에. '이국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남들이 뭐라 하든, 그 마을과 그 나라가 네 근원이다. 그곳이 너의 참 뿌리이다. 기억해라. 사이라 잔. 결코 잊어서는 안 돼.'"

사이라의 아버지는 이따금씩 주방을 점령하고 가족들에게 아프가니스탄 전통 방식으로 필라우를 만들어 줬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필라우 요리 강습을 들으면서 아프가니스탄 여행 계획을 세우는 놀이를 했다. 그러나 사이라가 열여섯이 되던 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고 사이라의 아버지는 고향 방문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그래도 사이라는 정말로 언젠가 아프가니스탄에 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 그러하 듯이 세상엔 두려울 것이 없다고 배웠다. 결국 사이라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 고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스물한 살이던 1986년 파키스탄 국경 지역인 페샤와르로 떠났다. 가족들에게는 아프가니스탄을 둘러보고 몇 달 뒤 돌아오겠다는 짧은 편지 한 장을 남겼지만 사이라는 여러 해 동안 아프가니스탄 행을 준비해 왔다.

사이라는 대학에서 페르시아어와 아랍어를 공부했고, 호신술로 무술도 배웠다. 신경을 강화하기 위해 스카이다이빙도 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뉴스라면 빼놓지 않고 읽고 스크랩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준 파크만 정원과 분수 이야기는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에 대항해 "이길 수 없는 고결한 싸움을 벌이는" 저항군 이야기로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기 위해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파슈툰족 대장을 따라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다

당시 사이라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없었다. 사이라는 불법으로라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기 위해 파슈툰족 대장의 힘을 빌렸다. 파슈툰족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에 걸친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민족의 이름이다. 이들은 본래 19세기, 영국이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선을 긋기 전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사이라는 힌두쿠시 산맥의 작은 요새를 지키는 대장 자히르 샤에게 돈을 주고 부르카를 쓴 채로, 때로는 남장을 하고 그를 따라 국경을 넘어 그리워하던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게 된다.

"트럭의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서구적인 나는 녹아 없어지고 내 안의 아프간적 성향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선조들이 수세기 전에 닦아왔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이제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 나는 내가 그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을 그리워했다."

▲ 아프가니스탄 타카르 지역 (출처 : 아프가니스탄여성혁명연합 홈페이지 www.rawa.org)

그러나 사이라가 직접 찾아간 고향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고향과 차이가 있었다. 사이라를 안내하는 대장 자히르 샤부터가 그러했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명예에 집착했고, 한시도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는 것을 참지 못했다. 떡 벌어진 가슴을 가로질러 탄띠를 걸고 수류탄을 주렁주렁 매단 그는 조끼 주머니에서 분홍색 플라스틱 거울과 빗을 꺼내들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자신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는 허풍으로 가득 찬 사나이였다. 남자 체면에 사이라가 신은 등산화보다 못한 신발을 신을 수 없어 시장을 뒤지느라 출발을 지연시키고, 멋진 바위만 보면 독사진을 찍어 달라고 보채는 난감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과장이 심하고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다지만, 그는 도를 넘어서는 인물이었다.

그래도 그가 일부러 길을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정도로 자주 밥과 잠자리를 청할 수 있는 마을에 들렀던 덕분에 사이라는 적막한 산비탈에서는 만날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종종 '코끼리 귀'라고 불리는 딱딱하고 넓적한 빵에 양고기의 기름을 발효시켜 물과 섞어먹는 야크니 수프로 끼니를 때우며 끊임없이 산길을 걸어야 하긴 했지만 사이라는 마음의 조국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사람들을 만나며 상상 속의 고향에 점차 가까이

비록 사리아가 우려했던 대로 자히르 샤의 과장과 즉흥적인 태도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사리아는 아프가니스탄을 다루는 프리랜서 기자로 페샤와르에 남아 몇 년을 보냈다. 페샤와르에 거주하면서 알게 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 몇 차례 더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오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사리아는 상상 속의 고향에 점차 가까이 다가간다. 오랜 전쟁으로 삶이 그을린 사람들에게서 연민을 느끼고, 자신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과 일상적인 충돌을 겪으면서 사리아는 진짜 고향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시간이 흘러 아프가니스탄이 변해 버린 것인지, 아니면 본래 아버지가 말했던 그런 모습은 없었던 것인지, 혹은 자신이 서양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때마다 사리아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전해 오는 이슬람의 가르침이나 옛 시인들의 시를 떠올리며 답을 찾으려 애쓴다.

한번은 사리아가 카불에서 한 가족의 저녁 식사에 초대 받았다. 곤궁한 살림에도 사리아에게 무, 치즈, 고기에 야채까지 들어간 필라우를 대접한 가족들은 사리아에게 "서구의 보통 사람들이 우리들 생활에 대해 뭐라고 말들 하는지" 물었다.

"지금, 여기 이 어둠 속에 앉아 이 가족의 기대에 찬 얼굴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면서, 나는 이들에게 내가 들었던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택한다. 나는 이들에게 시라즈의 시인 셰이크 사디의 구절을 인용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 몸의 지체이며
같은 본질을 지녔으니
한 부분이 억압받으면
다른 모든 부분도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그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 억압이 있다면 우리 모두와 관계있다는 것을 서구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틀렷다. 그들은 버려졌다. 여기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그들은 혼자다. 나는 그들에게 계속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들에게 희망도 줄 수 없다."

▲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아프가니스탄 내 무장세력의 폭력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석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출처 : 아프가니스탄여성혁명연합 홈페이지 www.rawa.org)

사리아의 여정을 따르면서 나 역시도 내 마음 속에 담길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게 됐다. 나는 사리아를 따라 동상이 걸릴 만큼 차가운 눈밭을 넘고 아몬드 꽃이 만발한 계곡을 지났다. 트럭 뒤칸에 걸터앉아 드넓은 초원 한 가운데로 지나가는 말 탄 농부를 보며 두 팔을 벌리고 "내가 왜 이 나라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는 달리 아랍에서 온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유머 감각이 결핍되어 있다고 중얼거리는 엔지니어 잔의 농담에 한바탕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사람, 문화를 소개하는 흔치 않은 안내서

사이라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사이라는 책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많은 것을 나에게 전해줬다. 선조들로부터 내려오는 가르침과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자신이 만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에 대한 시시콜콜한 속마음까지. 이방인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끌어 줄 이만한 안내서는 만나기 어려울 거다.

이제 내 상상 속의 아프가니스탄은 더이상 모래바람이 날리는 황량한 벌판이 아니다. 수 세기 동안 동양과 서양을 잇는 교차로가 되어 투르크족, 칭기즈 칸, 알렉산더 등 정복자들이 거쳐 가고 영국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략과 점령을 겪으면서도, 무자헤딘과 탈레반의 폭압에도, 또다시 반복되는 미국 등 외세의 점령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빛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다. 언젠가 내가 두려움을 떨쳐 내고 그 땅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당신이 그랬 듯이 진정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을 마주하고 그들을 사랑하게 되기를! 당신과 내가 믿는 신에게 기도 드린다.

"나는 안전거리를 두고 차양 아래 모여 앉은 서양인들을 보며 생각했다. 서양인들이 우리 민족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혹은 아프가니스탄인에 대한 신화를 그들 스스로 어느 정도 믿고 싶어하건, 그들은 결코 아프가니스탄인의 부리와 꼬리, 날카로운 발톱을 잘라내지 못할 것이며 매를 양순한 비둘기로 바꿔놓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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