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서너 차례 모이는 친구들과 함께 대포를 마시다가 오랜만에 우리 피정 한번 하자고 바람을 잡았다. 그것 참 좋은 생각!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몸이 마음을 못 따르는 법, 강화도 예수성심전교수도회 피정의 집에 모인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8명이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게 딱 좋았다. 나이는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 부부가 두 쌍에 나머지는 남자들이다. 피정 도우미로 극단 <해>대표 노지향 선생을 초청한 건 내가 했어도 잘 한 일이었다. 늘 비슷한 유형의 피정 말고 조금은 특별한 체험을 하고 싶은 욕심에서다. 노지향 선생은 역시 출중했다. 자기보다 10살씩이나 더 먹은 꼰대(?)들을 꼼짝 못하고 따르게 만들었다. 가벼운 놀이로 몸과 마음을 풀어놓더니 웃고 즐기는 가운데 차츰 내용이 심각해졌다. 그냥 놀자판이 아니었다.

거기서 한 놀이작업 중의 하나. 우리 앞에 의자가 세 개 놓인다. 가운데 의자는 나, 왼쪽과 오른쪽 의자는 내게 큰 영향을 주었거나 나와 깊은 관계가 있는 실제 인물로 정한다. 처음에 나는 왼쪽의 사람이 되어 그가 나에게 했던(혹은 하고 싶거나 했음직한)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바로 가운데 자리로 가서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다음엔 오른쪽 사람과도 그렇게 한다. 이렇게 몇 번 자리를 바꿔 앉으면 나와 양 옆의 사람은 관객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져 갈등이나 애증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점 숨김없이 속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게 잘 될까 했던 나의 우려는 순전히 기우였다. 친구들은 너무나 솔직하고 진지했다. 뭔가를 숨기거나 억지로 꾸며대는 기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노지향 선생의 덕이고 친구들의 덕이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왼쪽 의자에 돌아가신 아버지, 오른 쪽에 어머니를 모셨다. 두 분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났다. 또 주책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지금 그 놀이작업을 상세히 소개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제각기 설정한 인물들이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오로지 자기 가족뿐이더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그게 어떠냐고,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하는 독자가 계실 것 같아서 설명한다. 친구들의 모노드라마는 문득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치 않다”(마태10,37)는 성경구절을 생각나게 했다.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당신과 동일시하신 예수의 말씀이다. 우리들 중에는 본당의 사목회장, 사목위원도 있고 예비자 교리교사도 있다. 다들 나름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뭐가 잘못 된지도 모른 채 모두 하나같이 부모와 자식과 남편과 아내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제생활 30년이 넘은 나도 똑같았다. ‘늙어가는 나이’란 것이 나와 내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믿고 싶지 않지만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자들의 현주소가 아닐까? 도대체 예수의 사람이라 자처하는 나는 예수와 무관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고 보니 우리는 여태껏 신앙도 아닌 것을 신앙이라 했다. 교회도 아닌 것을 교회라 하고 제자도 아니면서 제자라고 했다.

나의 신앙 수준이 막대그래프가 되어 바닥을 긴다. 이 정도였구나. 피정을 지도한답시고 아는 체하는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마무리하면서 미사 중에 나는 내 느낌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하기 싫지만 해야 했다. 꼭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친구들인들 골치 아픈 나의 고백을 듣고 싶었겠나? 그런데도 그들은 오히려 미안하다며 나를 위로했다. 미사예물까지 챙겨 주었다. 원 세상에! 이거 뭐가 이러냐?

호인수 200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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