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초, 서울대신학교 철학과를 마친 우리 동기들이 논산훈련소 훈련병으로 박박 기고 있을 때 우리를 따뜻하게 보살펴주신 고마운 분이 육군 대위 이영수 신부님이었다. 그분의 후임으로 오셨던 이군형 신부님의 배려 또한 잊을 수 없다. 한 주간 내내 얻어터지고 깨지다가 주일에 임시 성당으로 쓰던 허름한 영내 극장엘 가면 왜 그리 주책없이 눈물은 쏟아지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가 펑펑 울며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해주신 그 하나만으로도 군종사제들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셨던 게 아니었나 싶다.

군종사제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나는 오랫동안 한번도 부정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 생각이 바뀐 것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내가 백령도 본당에 부임해서부터였다. 백령도의 해병부대에는 군종사제가 없었으므로 주일이면 내가 가는 공소에 신자 군인들이 모였는데 거기서 가끔 지휘관과 나 사이에 갈등과 마찰이 생겼다. 신자였던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내 강론이 군인정신을 해칠 위험요소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4월이면 4.19, 5월이면 광주민주항쟁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죽음 = 밀알 하나의 죽음 = 예수의 죽음” 등등. 그런 다음 주일에는 영락없이 전 사병 종교행사(미사참례)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부대 안에서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장교 몇 명이 내게 와서 강론에 신경을 좀 써달라는 노골적인 요구를 하기도 했다. 내가 그 때 군복을 입고 있었다면 화를 내기는커녕 항의 한번도 제대로 못 했을 걸?

현재 실시되고 있는 군종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내 생각은 매우 단순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덤벼드는 적을 먼저 죽여야 하는 것이 군인의 임무라면 남을 살리기 위하여 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예수의 사람’의 임무다. 그 중에도 사제는 골수분자다. 또 하나 있다. 군대사회는 명령과 복종만 존재한다. 일사불란한 수직사회다. 거기 철옹성 같은 유대교 율법과 체제에 도전한 예수의 정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암만 봐도 군복 속의 로만칼라는 어울리지 않는 억지 그림이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군인도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인 것을. 내 말은 군인사목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군대는 선교의 황금어장이니 하는 진부한 표현은 여전히 거슬리지만 거기, 그 사람들에게도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사명이다. 그러나 50여년 전, 한국전쟁의 와중에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만들어진 현행 군종제도는 이제 변화된 시대에 맞는 재검토가 절실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거론도 안 되던 양심적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도가 입법화의 문턱에 와 있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 사제의 신분으로 안 될 것, 못 할 것이 있나? 나의 비록 짧은 군 사목경험이나 여러 선후배 군종 출신 신부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런 건 없다. 교회 안에서 찬,반 토론이라도 활발하게 열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교회는 성령께서 알아서 지켜주시지 않는다.

이미 지난 2003년에 우리의 주교님들은 “우리는 어떤 명분의 전쟁도 단호히 거부한다.”고 선언하셨다. 마산교구 박창균 신부님의 솔직한 고백에 백번 공감한다. “군종사제로서 나는 사병들을 위해 일한다고 애를 썼지만 실제로 해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지휘관의 의도에 따라 말 그대로 종교행사만 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병에게 세례를 주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중략- 개방적인 군사문화를 위하여 군종제도를 폐지하고 민간인 사제에게 기회를 넘기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한국종교와 양심적병역거부 토론회) .<호인수 2007.10.11.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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