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한국순교성인의 달이 지나기 전에 한번 더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운 좋게 1996년에 서울대신학교의 이기명 신부님이 쓴 자료집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골 현황>을 발견했다. 가톨릭대학출판부 직원 유희숙 씨는 그 책을 찾는다는 내 전화를 받고 고맙게도 보관하던 3권 중 한권을 기꺼이 보내주었다. 30여년 전 신학생 시절에 청계천 헌책방을 헤매던 생각이 났다. 그 때는 내가 무얼 찾는다고 그랬었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그 후, 오늘까지 나는 꼭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서 여러 책방들을 전전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심하고 창피한 일이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벌써 오래 전에 내가 어딘가에 썼던 이야기다. 서양의 전통과 풍습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우리나라까지 순교성인들의 유해를 조각내어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하고 무슨 때만 되면 어깨에 메고 나팔을 불며 시위(?)를 해야 하느냐고. 이제라도 흩어져 있는 유해들을 한데 모아 모셔야 하지 않겠냐고.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반응이 없었다. 아무도 안 읽은 건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좋은 자료를 얻었으니 이번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유골 현황이라도 자세히 알아보고 쓰면 어떨까 싶어서....

이기명 신부님의 자료집에 의하면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는 순교하신 1846년 9월에 한강변 새남터 모래밭에서 안성 미리내로 이장되었고 1901년 5월에 다시 용산 신학교로 이장, 한국전쟁 때는 경남 밀양으로 피난했다가 1953년 휴전 후,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은 1960년 7월 5일의 처사다. 서울교구의 담당자들은 도대체 왜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3등분했을까? 굵은 뼈들은 대신학교로,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분리, 안치한 이유가 뭘까?

자료집에 따르면 대신학교 성당 제대 옆에 안치된 유해는 온전치 못한 부분이 많다. 거기에 없는 나머지 유해들이 작게 쪼개져서 사방으로 분배된 때문이다. 서울대교구로부터 유해 조각을 받아 모셔간 본당이나 기관들이 141곳에 달하며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원에서 분배한 유해는 자그마치 200개가 넘는데 그 중 일부는 일본과 미국에까지 보내졌다. 유해의 보관과 분배를 담당했던 장복희 수녀님에 의하면 유해들은 순교자 현양과 기도를 위하여 서울교구의 지시대로 성광 비슷한 유해함에 넣어 봉인, 분배되었다 한다. 장수녀님의 고백은 가슴 아프다. “나는 더 이상 유해 보관 및 분배작업을 맡고 싶지 않다. 이유는 성인의 뼈를 조금씩 자른다는 것이 너무 잔인한 짓이고 못할 짓으로 여겨지고 정서에 맞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여럿이 나눠 기도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이라도 남은 유해를 한 곳에 모아 큰 유리관에 봉안하여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자료집 62쪽) 아,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

우리 형제는 6남매다. 둘은 외국에 산다. 아무리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해를 나누어서 외국으로 모시고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명절이나 기일에 자손들이 부모님 누워계신 산소를 찾는 게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전쟁터에서 참혹하게 조각나고 흩어진 시신이라도 정성껏 모아서 형태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야 마땅한 법이거늘 어쩌자고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순교성인들의 유해를 수백 개로 잘라 제각기 나눠 갖고, 공경한다며 시가행진을 벌이는가? 올해도 서울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각 본당을 돌며 이른바 유해순회기도회를 했다. 나는 전문적인 공부를 못해서 말하기가 매우 조심스럽지만 글쎄, 이래도 되는 건가 모르겠다.

호인수 200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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