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최민식 사진작가]

낮은 데로 임한 사진. 우리 시대 최고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빈첸시오)은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사진들은 우리가 감추고 싶었던 시대의 아픔과 그늘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해준다. 시각에 따라서는 불순한 의도가 배어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매우 불편한 작품들이다. 한평생을 걸쳐 인간군상,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중점적으로 렌즈에 담아온 그가 나누고픈 이야기는 무엇일까?

▲ 최민식 빈첸시오 ⓒ박현동 신부

카메라의 렘브란트 혹은 거지작가

좁은 골목길이 걱정되었던지 몸소 마중을 나와 주차를 도와주었다. 팔십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정한 모습에서 남다른 기운이 엿보였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도 가난했다. 낡지만 정갈한 단독주택은 궁색한 티가 나지 않았다. 세 명이 앉으면 꽉차버리는 좁은 서재에는 사진화보집과 각종 책들이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최민식 작가는 차를 권하며 당시 분도출판사의 임인덕 세바스티안(Sebastian Rothler, 林仁德) 신부를 만난 내력부터 소개했다.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기에 두어 달 전에 찾아뵈었더니 얼굴이 많이 상하셨더군요. 80년대 말에 신부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을 하고 직원과 둘이서 부산에 오셨더라고요. 집 근처 다방에서 몰래 만났습니다.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에 제가 사회고발적인 사진을 찍는다고 수난을 많이 당했거든요. 그 때문에 의식주 해결이 힘들만큼 살림이 어려웠습니다. 그 무렵 신부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뻗히신 거예요. 달마다 찍은 사진을 들고 분도출판사에 찾아가면, 신부님이 하나하나 보고 마음에 드는 사진은 두고 가라 그러셨어요.

그렇게 해서 <인간> 4,5,6,7,8집을 신부님이 도맡아 출판해 주셨고 <사진말>이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한 7-8년 정도 신부님으로부터 상당한 도움을 받았어요. <인간> 4,5집은 판매금지를 당했고, 사진집의 사진들이 너무 어둡다고 정부에서 압박을 주었는데도 신부님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저를 지원해주었습니다. 사진인생 50년에 신부님이 안 계셨더라면 제가 추구하는 작업은 지속되지 못했을 겁니다.

최민식 작가는 지난 50여 년간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시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쉽게 찍을 수 있는 사진, 돈이 되는 사진을 찍으라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항시 그런 질문과 싸워 왔기 때문이다.

임 세바스티안 신부를 만나기 이전에 최민식 작가는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였다. 그러나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고수하기 위하여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고 부유함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1967년 영국 사진연감에 제 사진이 처음 실렸어요. 일본 사진 잡지에 난 응모기사를 보고 사진을 보냈더니 사진을 더 보내고 사진설명도 길게 써서 보내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제 친구에게 부탁하여 사진설명을 번역하고 사진과 함께 보냈어요. '카메라의 렘브란트'라고 과분한 칭찬을 해줍디다. 그해 영국 사진연감에 제 사진 넉 점이 실렸고, 1969년에는 독일 사진연감에 여덟 점이 실렸습니다. 그것도 하이라이트라고 제일 앞면에 실린 거예요.

그 다음부터 외국에서 상을 받거나 전시회 초청을 받은 횟수는 셀 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지작가'라는 별명이 붙고 아주 무시를 당했습니다. 독재자들이 새마을 운동할 때 이런 사진을 찍으니까 탄압이 오는 거예요. 심지어 여권도 안내줘서 외국에서 초청이 와도 못 갔잖아요.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았어요. 제가 갈 길은 오직 하나, 이 길이라고 마음을 굳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시대가 변하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정부가 문화훈장을 주더라고요. 또 최근에는 국가기록원이 제 모든 작품과 소장품들을 ‘민간기증 기록물 1호’로 지정해 영구보관하기로 결정했어요.

▲ 최민식 작가의 서재에 사진첩과 서적들이 빼곡하다. ⓒ박현동 신부

<인간가족>을 접하고 사진에 미쳐..

최민식 사진작가는 그의 나이 28세이던 1955년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이 기획한 사진집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을 접하고 사진을 시작했다.

저는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태어났어요. 연백군은 6.25 전쟁 이전에는 삼팔선 이남이었는데, 후에는 휴전선 이북 되었어요. 미술공부 하러 서울에 왔다가 6.25 전쟁을 만나 군에 입대하였다가 무공훈장까지 받고 제대한 후 부산으로 내려왔어요. 그런데 어릴 적부터 가졌던 미술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기가 힘들었어요. '더 늦기 전에' 이 한 마디가 너무도 간절했어요. 다행히 아내가 동의하기에 처남의 도움을 얻어 일본으로 밀항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미술학원 야간부에 등록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어요.

어느 일요일 헌책방에 들러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인간가족>이란 사진집을 발견한 거예요. 국경과 환경은 비록 달라도 모든 인간은 한 가족이라는 주제로 편집된 사진집인데, 그때 받았던 감동은 지금 다시 되새겨 봐도 너무나 생생합니다. 사진 한 점 한 점에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었죠.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기에 더 독창적이고 아름다웠어요. 결국 그 사진집이 반세기 동안 저를 사진에 미쳐 카메라를 둘러메고 다니게 만들었어요.

1957년 사진을 시작한지 11년 만에 최민식 사진작가는 개인 사진집 <인간> 1집을 출간했다. 그 당시 이미 사진집을 시리즈물로 내려고 마음먹고 있었고 고심 끝에 ‘인간’이라는 주제를 선정했다. 지금까지 14집까지 나왔는데 그는 사진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남루와 고통의 실상을 증언함으로써 위정자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그들의 직무유기를 고발하겠다고 생각했다.

리얼리즘 사진가로서 저는 그 어떤 것에도 눈을 감을 수 없었습니다. 후미진 곳을 외면할 수 없었어요. 인간이 머무는 곳은 어디라도 내 사진의 영역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고통에 처한 사람, 기도하는 사람, 우는 사람을 찍었어요. 저는 사진을 통해 사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휴머니즘 사회를 만들고자 했어요. 저는 꾸민 것, 느껴지지 않는 것, 가식적인 것을 부정합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트리밍(사진의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일)이나 포토샵 같은 조작을 절대 하지 않아요. 그런 탓에 저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나 봐요.

1982년 독일 정부의 초청을 받고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 <인간> 3집을 선물했어요. 여성인데 아주 예리한 분이었어요. 앞으로 몇 집까지 출판한 예정인가 묻더군요. 얼결에 10집까지 만든다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베토벤은 심포니 9번까지 만들었는데…" 하더군요. 내 사진집을 베토벤의 심포니에 비유한 그 말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어요. 그때 새로운 목표가 생겼죠. 인간 10집을 내는 것으로요. 2009년 14집까지 냈으니까 목표는 달성했고요, 올 가을 15집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난은 항상 저의 친구였어요"

최민식 사진작가는 불굴의 의지로 청각장애를 이겨낸 불후의 명작을 남긴 베토벤의 생애와 그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예술가 정신을 강조했다.

제가 편안하고 돈이 많았다면 사진을 못했을 겁니다. 명예를 위하여 혹은 작품을 팔아먹기 위해 예술을 한다면 말이 되지 않아요. 정신으로 해야지요. 제가 베토벤을 좋아하는데, 그분이 38세에 귀가 먹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잖아요. 그런 역경을 이겨내고 작곡을 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하느님의 계시가 내렸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어요. 만일 베토벤이 귀가 안 멀었으면 선배인 하이든과 헨델과 비슷한 음악을 작곡했을 겁니다. 베토벤의 명곡들 중에 대부분은 청각을 잃은 다음에 작곡되었어요. 예술가 정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일가를 이룬 화가나 문인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이점을 확실히 알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하느님께서 제게 가난을 주셨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려서부터 가난은 항상 저의 친구였어요. 아버님이 장애인이었고 도장 파는 일을 하셨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어머니와 제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어요. 아버님이 어떻게 천주교를 믿었는지 몰라요. 하여간 꽤 먼 거리에 있는 성당에 늘 걸어 다니셨어요. 아버지는 제게 뭘 하든 빈첸시오 성인처럼 살라고 입버릇처럼 그러셨어요. 빈첸시오 성인이 주교관에서 고아들을 키우며 사셨다고 하더라고요. 어릴 적부터 제가 곧잘 그림을 그리니까 밀레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최민식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의 바탕에는 가난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난은 인생을 옭죄는 굴레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단을 떠나지 않은 그는 학생들에게 가난에서 아름다움을 느껴보라고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제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 싫다고 합니다. 가난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당연한 반응일 겁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사는 진솔한 공간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어요. 누드나 꽃 혹은 석양을 찍은 사진을 보면 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름다움은 피상적입니다.

진짜 아름다움은 의미 있는 행동을 유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불쌍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도와주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잖아요. 이런 부분을 학생들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안 돼요. 성능 좋은 카메라를 장만하고 사진 대회에 출품해 상 받을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돈, 시간, 의식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이고요. 의식은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게 그게 안 되면 책을 통해서 간접체험을 쌓아야 합니다. 저도 다방면에 걸쳐서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많이 합니다. 의식이 없으면 작가정신이 생겨날 수가 없거든요.

서재에 쌓인 각종 서적과 사진집, 음반들은 그가 평생에 걸쳐 어떤 식으로 작가정신을 벼려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온갖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진의 외길을 걸어올 수 있는 바보 같은 신념이 있어서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한다는 최민식 작가. 그는 자신이 쓴 책, <낮은 데로 임한 사진>(눈빛출판사, 2009)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계속 걸었고, 언제나 카메라와 함께 있었다. 그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카메라로 사람들을 찍었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나는 그들을 찍었다. 나는 없는 길을 간 것도 아니고,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을 찍은 것도 아니다. 나는 계속 권력자 앞으로 불려갔다. 하지만 나는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 카메라를 들고 또 길을 걸었다. 사진은 역사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를 늘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 카메라는 가난한 이들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대담정리 분도 편집부
사진제공 최민식 빈첸시오,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행하는 <분도>지 2012년 여름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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