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는데 우리 신부나 수녀들의 휴가 소식을 교우들에게 알려서 은근히 봉투나 바라는 얍삽한 잔머리는 내게 없다. 그런데도 내게는 잠시나마 조금 섭섭한 구석이 있었음을 가벼운 마음으로 고백한다.

수녀님과 보좌 신부님의 휴가를 주보에 냈을 때는 교우 할아버지 한분이 슬그머니 내게 봉투를 쥐어주시며 두 분께 전해달라고 하시더니 정작 본당신부인 내가 휴가를 간다고 공지했을 때는 누구 하나 봉투 한 장 손에 쥐어주는 이가 없었다. 이거 뭐가 이래? 내가 이만큼 인심을 잃었나? 돈 많은 부잔 줄 아나? 인간미라곤 눈 씻고 찾아도 안 보여서? 아니면 나는 본당신부니 알아서 챙길 거라고? 도대체 왜 내게는 봉투 한 장 주는 사람 없느냐 이거다. 점심을 먹으면서 주방아주머니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장대소, “신부님은 경력이 얼만데 신자들이 수녀님이나 보좌신부님하고 똑같이 생각하겠어요?” 그런가? 이야기하고 보니 나도 머쓱해지면서 내 말이 우스웠다. 아직도 나는 밴댕이 소갈딱지였다.

그간 나의 마라도행은 날씨와 시간 등 여건이 맞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었다. 네 번째 시도 끝에 비로소 성공, 말로만 듣던 우리나라의 최남단 마라도를 갔다. 언젠가 내 친구 이성득 신부가 갯바위에서 낚시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했던 곳. 마라도는 크고 작은 굴이 뻥뻥 뚫린 검고 거대한 바윗덩이 위에 살짝 얹혀진 파아란 풀밭이었다. 그리고 바람. 거센 바람은 갑자기 듣는 빗방울을 막으려고 급하게 펴든 팽팽한 우산을 여지없이 툭 꺾어버렸다. 그 때문일 게다. 섬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다. 마치 여인의 풍성한 머리털을 연상케 하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풀들만이 숨가쁘게 눕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나지막한 양철지붕과 키 작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마당은 색색의 채송화 밭.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것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곳. 게양대 위의 태극기와 해양경찰기만 격렬하게 시달리고 있었다. 왜 바깥세상에는 남보다 높게 우뚝 서야 성에 차는 사람들이 그리 많을까?

뽀르찌웅꼴라. 꼰벤뚜알프란치스꼬 수도회 소속 민성기 신부(그는 나와 함께 부천 상동본당에 살았는데 2004년 10월에 북한산에서 심근경색으로 천당 갔다)가 2000년 부산 대연동 본당 재직 당시에 신자들과 함께 통일의 염원을 담아 지은 성당 이름이다. 옛날 이태리의 거지 프란치스꼬 성인이 아시시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작고 볼품없는 경당에 자주 들러 기도하셨는데 그 경당이 뽀르찌웅꼴라였단다. 그 뽀르찌웅꼴라가 마라도의 남쪽 언덕 풀밭 위에 마치 전복 껍질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그림 같이 엎드려 있는 것이다. 민성기는 왜 하필이면 한반도의 최남단 마라도에 이런 성당을 세우려고 했을까?

현관 옆 돌판에 2006년에 제주교구에 기증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수도회 소속 사제가 남의(?) 교구 관할구역에 성당을 지었으니 그 인가와 소속 문제를 놓고 서로의 심경이 매우 불편했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났지만 애써 머리를 흔들었다. 성당 건물이 누구의 것이든 무슨 상관인가? 지금은 그저 성당 내부가 궁금할 뿐이다. 평소에는 잘 안 하는 기도, 이럴 때는 굳이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게 변덕스러운 내 마음이다. 그런데 낭패로다. 현관 문고리에 주먹만한 자물통이 채워져 있었다. 같이 갔던 제주도 교우의 말, “전에 왔을 때도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군요.” 위를 올려다보니 작은 창문 몇 개는 열려진 채였다. 비바람에 빗물이 다 들이쳤겠다.

마라도에도 예쁜 초등학교 분교가 있고 주민이 살고 있었다. 서로 원조라고 소리치며 손님을 끄는 자장면집이 둘이나 있었다. 예배당도 있고 큼직한 절도 있었다. 그 사람들 중 누구 한 사람에게 열쇠라도 맡겨두면 안될까? 그 관리비는 얼마나 들까?

모슬포항으로 돌아오는 뱃길은 파도가 높은데다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르는 유행가 소리에 두통이 일었다.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호인수 2007-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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