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이분법을 넘어 상처의 치유로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 개의 문>, 연분홍치마 제작, 2012

늘 생각하고 산 건 아니다. 미안하다. 가끔 생각했다.
문득 버스를 타고 용산을 지나다보면 가슴에 압정이 박힌 듯 따끔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2009년 1월 20일 이후 마음에 납덩이를 얹고 살게 했던 용산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아픈 자리였다. 돌아보기 괴로운 상처였다.

그날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이었나

무서웠다. 그런 불바다를 목격한 것만으로 겁에 질렸다. 공포와 혼돈과 절망이 뒤섞여 끓어올랐지만, 압도적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서슬 퍼런 권력에 대한 두려움, 지금 세상을 맘껏 주무르는 저 힘이 영속적일 것만 같은 두려움, 입이 열리지 않는 두려움. 진실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조차 그런 막막함을 이겨내야만 가질 수 있었다. 비통한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것도 겁났다. 생지옥을 본 충격은 컸다.

희생자들과 어떻게든 자신을 ‘분리’하는 게 우선 살 길처럼 보이기도 했다. ‘개발예정지’인 용산과 내가 사는 동네와 집을 분리하고, 자영업자였다가 철거민이 된 희생자들과 나의 처지도 분리해야 일단 숨이라도 쉴 것 같았다. 내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믿게 할 ‘차이’들을 먼저 찾았다. 그럼에도 나와 내 이웃과 닮은 저 평범한 삶이 주는 공포는 심각했다.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 개의 문>, 연분홍치마 제작, 2012

용산참사는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죽었기 때문에 ‘마녀’가 되어야 했다. 경찰특공대가 투입됐기 때문에 시위자들은 모두 ‘테러범’이 돼야 했다. 그래야 결론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1983년 전두환 정권 때 창설된 경찰특공대의 임무는 ‘대 테러 진압’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시위에 투입되지 않는 아주 특별한 정예부대인 것이다. 결과가 아니 출동명령을 내린 그 한 통의 전화가, 발생동기까지 모든 것을 강제로 스토리텔링 해버린 사건이었다.

용산, 잊고 살 수 있었나요?

그날, 우리 속의 어떤 한 부분은 죽었다.
시커멓게 그을려 그대로 거대한 관이 돼버린 남일당 건물 아래를 오가야 했고, 용산의 개발이익이 얼마라는 언론의 장밋빛 뉴스를 들어야 했다. 참사는 있었는데 처벌마저 희생자와 유가족의 것이었다. 관련된 공직자들에겐 입신양명의 나날이 이어졌다. 망자가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는 세월이 자꾸만 흐르고 있었다. 냉동고에서 언 땅으로의 355일만의 장례도, 그 춥고 추웠던 눈 내리던 이듬해의 영결식과 노제도, 조용히 조용히 치러야 했다. 그 장례를 잡기까지의 시간들마저 문정현 신부님 표현대로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완간한 강신준 교수는 용산참사를 “소상인들의 소유권 주장에 대한 거대기업의 사적 소유권의 주장을 국가가 공권력을 통해 편 든 것”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국가보다 영속할 듯이 보이는 자본에 대한 국가의 일조가 부른 참사의 선례는 많다.

살아있는 사람의 할 일은 무엇이며 죽은 사람의 몫은 무엇인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자리매김에 대해, 죽은 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산 자들의 의무와 도리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던 시간들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답게 묻히지 못하고 ‘물증’이 되어야 했던 이들에 대한 죄스러움이 너무 컸다. 그뿐인가. (숫자가)‘너무 많아서’ 집단 도살로 수급조절 당해야 했던 소와 송아지들, ‘너무 경제적이지 못해서’ 떼죽음 당해야 했던 4대강의 뭇 생명들, 어느 한 생명도 그렇게 떠나보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영화는 어떻게 이분법을 넘었나

▲김일란, 홍지유 감독의 <두 개의 문>, 연분홍치마 제작, 2012
희생자 유가족들은 영화 <두 개의 문>을 이렇게 말한다. “상처를 끄집어내 힘들게 하는 영화. 하지만 사람들이 다시 용산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 고마운 영화.” 유가족들이 배급위원까지 맡아가며 그 아픈 상처를 후벼파도록 허용한 이유는 사람들이 다시 용산을 이야기해주길 바라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국가보다 자본보다 영속하는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의 힘이라고 역사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을 위무한다.

‘경찰특공대’는 특별히 충성심이 뛰어난 대원들로 구성돼 있다. 다만 그 모든 게 애국이라 믿으며 ‘하라는 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정규 경찰이 아닌 태생적 한계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맹목적 명령일지라도 죽음을 불사해야 한다. 그들의 안전과 행위의 정당성은 따라서 명령권자가 책임져야 한다. 그들은 남일당에 정보도 없이 급히 투입되었다. 건물에 문이 몇 개인지도 모르는 채 우왕좌왕했다. 평소 출동 방식이 아니었던 거다.

그 어떤 집단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특공대원들을 거대기업의 사적 이익을 위한 생지옥에 희생시킨, 대원들로 하여금 충성의 기준과 인간으로서의 양심 사이에서 괴로워하게 만든 책임자는 누구인가? 왜 명령권자는 보이지 않는가? 영화 <두 개의 문>은 경찰특공대원들의 혼돈과 고통까지 들여다보았다.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가 닿지 못할 통찰력이다. 분노와 증오를 이겨낸 영화의 시선과 유가족들의 자세가 놀랍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영화 <두 개의 문>은 또한 우리의 어깨를 가볍게 해 준다. 목청 높여 함께 싸우지 못했다 해도, 소셜펀딩으로 834명의 배급위원중 하나로 참여하지 못했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잊고 살고 싶었지만 잊혀지지 않았노라는, 그동안 한 게 없어 미안하다는,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생겼지 않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씀하신 깨어있는 시민수칙 중 하나인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 정도의 실천은 되지 않겠는가. 삶의 자리가 순식간에 폐허가 되는 참사의 가능성은 한 번도 나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 말없는 지지만으로도 홀가분해질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개봉 8일만에 1만 관객 동원’으로 입소문을 낼 기회에 참여할 수 있어 기뻤다. 이미 4만3천여 명이 여기에 동참했다. 영화의 소임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사람들의 입을 열게 한 것, 고맙기 그지없다. 비로소 이렇게 이야기는 다시 시작됐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우리의 몫이다. 용산의 스토리텔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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