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6]

우리 집과 골목길 하나를 두고 이웃해 있는 집이 있다. 거기엔 한평 아주머니와 어르신이 살고 계신데, 아주머니가 50대 중반, 어르신이 60대 초반으로 마을에서 젊은 축에 드는 분들이다. 시골에서 그 나이면 한창 팔팔할 때라고 하는데, 어찌된 게 부부싸움을 하는 데 팔팔한 기운을 다 써버리시는 것 같다.

문제는 바로 술! 어르신은 평소에는 큰 눈망울을 껌벅이는 송아지처럼 순하디 순한데, 술만 드시면 딴사람이 되었다. 아주머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대고, 때릴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러면 아주머니는 어르신과 맞서서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에는 다른 집으로 피신을 가셨다.

언젠가 한번은 아주머니가 우리 집으로 피신을 오셨다. 처음에는 아무 말씀도 없이 한참을 흐느끼시다가 마침내 울먹이며 말씀을 꺼내셨다.

"못 살겄어. 더 이상은 못 살겄어. 남들은 죽어라 일하는데 만날 술만 묵는당께. 저러다 죽을라고 그러나. 밥 안 먹고 술만 먹는당께.”

“그래도 어르신 같은 분이 어디 있어요. 술 안 드시면 날마다 꼴을 몇 번씩 베어 오시던데요….”

정말 그랬다. 어르신은 술만 많이 안 마시면 소처럼 일하는 우직한 일꾼이다. 소 두 마리를 키우시는데, 날마다 꼴을 뜯어다 먹인다. 소 준다고 논둑에 풀약도 안 하시고, 어디에 소 먹잇감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다. 그 정도로 소를 자식처럼 애지중지 한다.

“소만 먹이면 뭐해. 농사일을 안 하는데. 나만 뼈 빠지게 일하제, 자기는 일도 안 한단 말이여.”

아주머니 말씀도 맞다. 어르신이 전에는 농사일을 꽤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직접 소를 부리고 경운기를 몰아 논 농사를 스무 마지기 넘게 지으셨다지? 그런데 자기 땅이 없이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더니 고생만 많았지 손에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단다. 게다가 빌린 땅마저도 대형 농기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아예 농사일에 흥미를 잃어버리신 것이다. 이제는 논 두 마지기 농사가 전부인데, 그것도 억지로 짓는 기색이 역력하다. 밭 농사엔 아예 관심이 없어서 거의 아주머니가 혼자 다 하신다.

사실 시골에서는 부부가 한몸처럼 살아간다. 안살림과 밭일은 주로 여자 몫이고, 논농사와 집 관리는 남자 몫이다. 이건 남녀 불평등이 아니고 남녀 역할 분담이다. 어느 한쪽이든 자기 역할에 충실하지 않으면 한 사람에게 무게가 실려 그 사람이 힘들 수밖에 없다. 또한, 한 사람이 제 몫을 잘 하면 다른 한 사람도 더 힘을 내서 자기 몫을 다 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까닭에서 그 관계가 뒤엉키고 비틀리게 되면 한평 아주머니네와 같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제는 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어르신은 열정을 품고 땅을 판 세월이 무의미하게 여겨져서, 그래서 술을 찾으시는 건지도 모른다. 누구든 죽어라 일했는데 인정도 못 받고 보상도 못 받는다면 화도 나고 서글프지 않겠는가. 게다가 요즘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인정받기는커녕 사람대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대니, 그 억눌림이 술기운을 빌려 폭발하는 것이리라. 그것도 애꿎은 마누라에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부터는 의도적으로 어르신께 힘을 실어 드리기로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레에 꼴을 싣고 오실 때면 물이라도 한 잔 갖다 드리며 “더운데 정말 애쓰시네요. 어떻게 이렇게 풀을 많이 베셨어요. 일을 참 잘하세요.” 하고 말씀을 드렸다.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면 “아주머니가 어르신 칭찬을 많이 하세요. 옛날엔 그렇게 일을 많이 하셨다면서요. 어르신 몸 상하실까 많이 걱정하시던데 술 조금씩만 드세요.” 하고 말씀드리기도 했다. 아주머니께 어르신 좀 추켜세워 드리라고 슬쩍 코치도 하고 말이다.

꼭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르신이 요즘 많이 달라지셨다. 한번은 한평 아주머니와 포리똥 열매를 따러 가기로 약속해서 아주머니네 밭 있는 데까지 찾아갔는데, 두 분이 함께 들깨를 심고 계시는 게 아닌가. 또, 얼마 뒤엔 함께 밭에 거름을 내러 가기도 하고, 아주머니가 장에 다녀오시는 사이 어르신이 밥통에 밥을 안쳐 놓기도 했단다. 예전 같으면 밥 안 해 놓고 갔다고 술 마시고 난동을 피웠을 게 분명한데, 정말 많이 달라지셨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변하는 것, 그건 굳게 닫힌 문이 열리는 것처럼 놀랍고 신나는 일이다. 이런 변화무쌍함이 있어서 살맛이 난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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