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 ⓒ박홍기 신부

“나 수녀원 나왔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전화 수화기를 든 채 한참동안 멍했다. 전에도 이런식으로 내 뒤통수를 치고 떠나더니 이번에는 앞통수다. 그녀의 이름은 배신자. 내가 붙인 죄목이다. ‘배신’에다 ‘괘씸’까지 더한 죄다.

우리는 대학병원 약제팀에서 같이 일했다. 팀원중에서도 손발이 척척 맞는 동료였고 적극적이고 활발하고 명석한 그녀가 옆에 있어서 든든했다.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사직서를 냈다. 수녀원에 간다고 했다. 폭탄선언이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훌쩍 떠났다. 오래오래 같이 일하자는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떠난 그녀가 분하고 섭섭했다.

“얼마나 잘 사나 두고보자!” 서원식이다 종신서원이다 하며 그녀가 초대장을 보낼때마다 무시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쾌씸 반 그리움 반으로 스물스물 그녀의 소식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휴가를 내서 재래시장에 들러 그녀가 좋아하는 개떡을 한아름 사들고 수녀원행 기차를 탔다. 십년만이었다.

긴장되고 떨렸다.생소한 수녀원의 거실에 앉아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혼자 속으로 몇 번씩이나 다짐했다. ‘농담 절대 금지. 엄숙한 표정. 예의를 다할 것.’ 등등...

드디어 수녀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 옛날의 명랑약사는 수녀복과 머리수건을 단정하게 쓴 낯선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색하고 긴장돼 우두커니 서 있는데 “와! 이거 개떡이잖아! 마리아 넌 역시 최고야!” 수녀님은 탄성을 지르며 몸을 날려 저만치 놓여있는 개떡봉지를 덥썩안았다. 개떡냄새를 맡은 것이다.

수녀원이라는 것외엔 우리사이에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개떡을 좋아하고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한 고뇌와 노력과 모험의 길을 닦고 있었다. 그날 돌아오는 기차안에서 그녀가 저지른 배신에 무죄를 선언했다.

그후 나는 그녀를 까맣게 잊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내 앞통수를 치며 돌아왔다. “왜?!” 질책과 추궁섞인 내 질문에 “모른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설명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지금 그녀는 그 누구도 심지어 자신도 해명할 수 없는 선택을 했기에 누구의 이해도 동의도 받지 못하고 온전하게 혼자 고통을 겪는 중이었다.

다시 그녀는 수녀복 대신 흰색 약사가운을 입었다. 가끔 염려와 조바심으로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 수녀원에서 돌아왔다는 이력 때문에 상처받고 스스로 자유롭지 못할까 염려가 되어서다.

어릴적 읽었던 동화 ‘인어공주’의 감동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비극적 운명까지 감수하면서 인어공주가 왕자를 사랑했다는데 있었다. 인어공주를 키운 할머니는 말한다. “얘야 인어는 바닷속에 있을때 가장 행복한 거란다. 우린 자그만치 300년이나 살 수 있잖니?” 인어공주도 언니들처럼 바닷속의 만수무강을 선택했다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비극은 면할수 있었을 것이다.

인어공주에게 왕자는 이룰수 없는 꿈을 품게 만들고 동시에 그 꿈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러니 왕자를 사랑하지 않는 인어공주라니, 그런 인어공주는 아름답고 감동스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없지 않은가?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에게 더 높이 날아오르고픈 꿈이 없었다면 <어린왕자>에서 왕자가 장미와 여우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탄생할수 없었듯이 말이다.

’바닷속이 제일 편하다‘는 언니들과는 달리 인어공주는 ’이 세계 너머‘를 꿈꾸었다. 인어공주가 원한 것은 단지 멋진 왕자님과의 결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수명이 보장되어 있는 대신에 죽으면 영원히 사라지고 다른 생명으로 부활할 수 없는 인어와는 달리 인간은 짧은 인생 대신에 '불멸의 영혼'을 가졌기에 인어공주는 '혀'와 '꼬리'를 잃는 고행을 선택하면서까지 왕자를 사랑하는 모험을 통하여 인간이 되길 바랬다.

"나 수녀원으로 돌아가!" 혹은 "나 결혼해!" 언젠가 또 그녀가 이렇게 내 옆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나는 믿는다. 그녀도 인어공주처럼 모험을 하는 거라고. 모든 모험은 사랑을 향한 부름이라고. 인어공주에게는 '왕자'가 또 누구에겐 '신' '절대자'가 그리고 또 다른 누구에겐 '정의' '평화'가 이름만 다를 뿐 인간의 말로 설명할수 없고 머리로 이해할수 없는 그런 불멸의 사랑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어공주의 선택이 배신이 아닌 모험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듯이 그녀도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모험중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녀의 변신을 응원한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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