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최재훈]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흔히 영화 앞부분에 올라오는 이런 크레디트는 단순히 관객들에게 사전에 그렇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이 영화는 마법사가 빗자루 타고 날아다니는 따위의 허구와 상상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러니까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감동에 흠뻑 젖어들거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몸서리쳐달라는 일종의 바람이자 당부인 것이다.

그런데 감동이야 굳이 그 대상에 상관없이 그저 크고 깊을수록 좋겠지만, 분노의 경우는 좀 다르다. 감독이 발사한 분노의 화살이 원래 의도한 과녁을 향하지 않고 자칫 엉뚱한 곳에 가서 꽂히게 되면 영화는 그 때부터 정치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무기로 돌변해버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더 스토닝(The Stoning of Soraya M)>은 아주 위험한 영화다. 감독과 제작자가 의도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말이다.

1986년 이란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14살짜리 소녀에게 새장가를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남편의 계략으로 인해 간통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투석형에 처해진 소라야 마누체리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실화다. 그녀의 억울한 죽음은 끝까지 그녀의 죽음을 막아보려고 몸부림쳤던 이모 자흐라의 용기 있는 고발 덕분에 이란계 프랑스 기자(프리든 사헤브잠)의 펜을 빌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고, 그 기자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한 것이 바로 <더 스토닝>이다.

간략한 줄거리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분노할 대상들로 스크린이 꽉꽉 채워져 있다. 희번덕거리는 그 두 눈깔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주고 싶을 정도로 저주스러운 남편 알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결백을 알면서도 과거 성범죄자였던 자신의 전력이 드러날 까봐 알리와 함께 음모를 꾸미는 종교지도자(물라) 하산, 별 돼먹지 않은 법률 운운하며 소라야를 돌팔매형에 처하게 해놓고는 혼자 고뇌하는 척 하는 마을 시장 에브라힘, 그리고 마치 이런 일이 터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땅을 파고 돌멩이를 주워 던지는 마을 남자들까지(여기엔 소라야의 아버지와 두 아들도 포함된다). 아마 한 편의 영화에서 분노해야 할 인물들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는 영화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 같다.

뿐만 아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분노하는 대상은 비단 등장인물 개개인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은 무조건 남성에게 순종하고 그들을 만족시켜줄 의무가 있다는 극단적인 가부장주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자들의 세상이란 걸 잊지 마라”고 대놓고 가르치는 남성우월주의, 아내가 남편을 고발하려면 아내가 직접 남편의 잘못을 입증해야 하고 반대의 경우에도 아내에게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의무를 지우는 ‘법’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이 바로 그 대상들이다. 그리고 영화를 본 우리가 이 모든 것들에 분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따로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슬람에 쏟아지는 탄식과 욕지거리.. <꾸란>과 상관없다

그런데 문제는 <더 스토닝>이 우리에게서 이끌어내는 분노가 화살보다는 차라리 수류탄에 가까워서 원래 목표한 과녁이 아닌 그 주변에까지 날아가 박힐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이 내뱉는 탄식과 욕지거리의 대략 절반 정도는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를 향한 걸 거라는 이야기다. 물론 한 편으론 그 자체를 영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졌다 한들 멀쩡한 여성을 허리까지 땅 속에 파묻어 돌팔매질로 죽이다니, 그런 야만적인 행위가 버젓이 이슬람의 율법에 근거해 행해지다니, 어찌 혐오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영화가 말해주지 않는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알다시피, 이슬람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알라)에게서 받은 계시를 구술한 <꾸란>을 문헌적 토대로 하고 있다. 헌데 <꾸란>을 아무리 찾아봐도 간통한 여성을 돌로 쳐 죽이라는 내용은 없다. 물론 ‘너희 여인들 가운데 간음한 자 있다면 네 명의 증인을 세우고, 만일 여인들이 인정할 경우 그 여인들은 죽을 때까지 집안에 감금되거나...(4장 니싸아 15절)’란 구절이 있긴 하지만, 바로 다음 절에는 ‘너희 가운데 두 명이 간음했다면 그 둘을 함께 벌할 것이되 그들이 회개하고 개선한다면 그대로 두라. 하느님은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시니라’고 적혀 있다. 징벌보다는 회개와 용서를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꾸란>에서는 여성의 상속권과 재산권, 이혼할 권리 등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이 전적으로 남녀평등에 기초한 종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느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거나, 순종하지 않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주라는 따위의 내용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건 오늘날의 잣대로 판단하기 보다는 이슬람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부장성이 강했던 7세기 아라비아의 유목사회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일정 정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무슬림들 대부분은 무함마드의 가르침 중에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릴 줄 아는 정도의 유연함과 상식은 갖추고 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간통한 여성을 투석형에 처하는 따위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도 아니요, 무함마드의 가르침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소라야를 살해한 저들이 흔들어대던 이슬람 율법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그건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흔히 '샤리아'라 불리는 이슬람 법률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만들고 정한 게 아니다. 무함마드가 구술한 <꾸란>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믿음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의 이성을 강조하는 데 그 분량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후대의 종교학자들이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률이 바로 '샤리아'다. 그런데 다른 모든 종교가 그렇듯, 하나의 가르침을 두고도 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슬람과 그 법률인 샤리아는 절대 단일하지 않으며, 시대와 지역, 사회적 풍토와 문화에 따라 수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더 스토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슬람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얼굴의 이슬람이다. 아니, 그런 얼굴을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이다. 이슬람 사회 내에서도 그 보편성과 합리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소라야의 이모인 자흐라가 남성들에게 맞서면서 외쳤던 “나의 신은 당신들의 신과는 달라”라는 대사도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감독은 우리에게 그녀의 그런 외침을 곱씹어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의 기억 속에는 무려 20분이 넘는 길고도 디테일한 투석형 장면 내내 남자들의 입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던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란 구호만 내내 맴돌 뿐이다. 내가 이 영화를 위험한 영화라 여기는 이유다.

인권을 명분 삼은 외세의 개입과 전쟁이 이슬람 극단주의의 숙주
세계 최대의 민간군사기업 '블랙워터'의 최고경영자가 제작비를 댄 영화

▲<더 스토닝> 사이러스 노라스테 감독, 2008년작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슬람 가운데서도 가장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띤 이슬람 근본주의가 유독 그 고개를 쳐들고 힘을 키워갈 때가 있다. 과거 아프간에서 미국이 돈과 무기를 쥐어주며 양성한 무자헤딘 전사들이 민중들을 상대로 갖은 악행을 저지를 때가 그랬고(그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이들이 바로 탈레반이다), 테러를 뿌리 뽑고 여성들을 해방시킨다며 서구의 군대가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가 그랬다.

또한 미군의 무인기가 소리 없이 날아와 수시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과, 역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군대의 침공으로 인해 다시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소말리아가 지금도 투석형이 간간히 벌어지는 대표적인 지역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도주의나 인권을 명분으로 한 외세의 개입과 전쟁이 결국 이슬람 극단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숙주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스토닝>은 보편적인 여성인권에 대한 메시지와 더불어 여성들의 인권을 짓밟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악마성을 고발하는 영화다. 이는 오랫동안 이란의 이슬람 정권을 반드시 무너뜨려야할 적으로 상정해온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지구상 어디에선가 한시도 끊이지 않고 전쟁과 폭력이 벌어져야 자신들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군산복합체들도 반길만한 영화다. 분쟁지역 곳곳에서 폭력과 재앙의 씨앗을 뿌리는 세계 최대의 민간군사기업 '블랙워터'의 최고경영자였던 에릭 프린스가 이 영화의 제작비를 댄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내가 이 영화를 위험하다고 여기는 또 하나의 이유다.

 

최재훈 (안토니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국제연대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점점 밑천이 바닥나 솥단지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 활동을 그만두고 훌쩍 캐나다 밴쿠버로 떠남. 그곳에서 'Mobilization against War and Occupation'이라는 현지 반전운동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년 내내 열심히 유인물 돌리고 포스터 붙이러 다닌 끝에 뭔가 깨달음을 얻고 귀국. 그때부터 지금까지 국제연대단체 '경계를넘어'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2008년에 노엄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개정판, 이후출판사)을 번역했으며, 2011년 7월에는 여행기 <괜찮아, 여긴 쿠바야>를 공동집필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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