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수녀의 이콘 응시]


En Cristo

우리 나라에서는 장례미사가 있을 땐 부활초를 제대 옆에 켜 둔다. 어둠을 밝히는 빛, 즉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에 우리도 그분처럼 부활하리라는 ‘희망의 빛’인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조금 다르다. 부활초 대신 바로 ‘부활 이콘’을 시신 옆에다 두어 이 이콘을 바라보면서 문상객들은 죽은 이가 하늘나라에서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영복을 빈다.

지옥의 문을 부수신 상징적인 열쇠

이 이콘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지하 어둠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빛의 세계로 끌어 올리고 계신다. 바로 ‘아담’이다. 죽음의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모양으로 포개진 지옥문을 밟고 왼손에 말씀을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쥐시고(어느 것은 십자가를 지고 계신다) 오른손은 아담을 끌어 올리시며 그 뒤에는 하와가 있다. 아담의 구원은 바로 인류 전체의 구원이고 우리의 구원이며 구체적인 나의 구원을 의미한다.

지옥의 문을 부수신 상징적인 열쇠가 열린 채 어둠속에 떨어져 있고 치욕의 상징이었던 당시의 십자가가 바로 어둠의 세계를 쳐부수는 승리의 십자가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 옆에 그분의 도래를 기다리던 다윗과 솔로몬, 세례자 요한이 있다.

그분의 부활로써 어둠의 지배를 받던 죽은 모든 영혼이 그분과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으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 부활 이콘을 묵상하면 할수록 각자에게 전해오는 희망의 메시지는 나 또한 구원의 대상이며 그리스도는 ‘나’라는 존재의 머리카락까지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런 나를 어둠의 세계에 두지 않으시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참으로 가볍게 그 분의 팔에 안기는

시기적으로 얼마 남지 않은 위령성월을 보내고 있다. 지난 월요일 후배 수녀의 부친상 장례미사에 참례하였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새벽부터 나선 길이라 마음도 스산하였다. 그래선지 장례식장에 도착하였을 때의 따뜻함은 참으로 고마웠다.

이미 빈소는 치워지고 모두들 미사 준비로 분주하기에 커피 한잔 마시면서 미사 시간까지 혼자 연도를 바칠 마음으로 몸을 녹이고 있는데 외국인 수사 한 분이 나에게로 다가오며 인사를 하는 것이다. 루이스라는 멕시코 사람이였다.(루이스의 이야기는 성모 이콘에서 나누기로 하겠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되어 함께 미사를 드리며 돌아가신 영혼을 위해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겸허해지고 숙연해 지는 순간으로 만들었다.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신 분이라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우신 모습으로 고별식을 하는데 꼭이나 주무시는 듯 하였다. 마지막 작별을 하며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더욱 마음이 찡하였다.

그 순간 난 바로 이 부활 이콘을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는 이 영혼을 어둠의 세계에 두지 않으시고 힘있는 당신 팔로 끌어 올리고 계시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데 영혼이 참으로 가볍게 그 분의 팔에 안기는 것이였다 아! 그분께서 이 영혼을 당신의 나라로 데려 가셨구나. 아픔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는 하느님의 나라로 말이다.

좀 더 살고파 했던 진시황제도 불로초를 찾아 헤맸다지만 그것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지위도 권세도 돈도 명함을 내밀 수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받아들임이다. 그게 죽음인 것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 갈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소중한 그 무엇을 가졌다고 해도, 새털보다 가벼운 그 무엇이라도 죽은 영혼이 들고 갔다는 이야기는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하였다. 빈손으로 와서 정말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나무의 잎들이 아름답게 물들어 자신의 이미지를 한층 돋보인다 하더라도 바람 한번 불으니 다 떨어지더라. 그렇게 죽음은 오는 것이고 모든 것을 다 놓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같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그러나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바로 자신이 살면서 쌓은 공덕이다. 어떤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나이도 얼마 되지 않는데 “잘 죽었어. 이제 저 사람의 가족들이 기를 펴고 살겠군......” “저런 인간은 빨리 죽는게 낫지....”라고 말하는 경우를 몇 번 들었다.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모르지만 만약 우리 자신이 죽을 때 이러한 말들을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런데 어떤 이는 수(壽)를 다하고도 아깝다는 말을 듣는다. “그동안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이제 어떡하나. 저렇게 좋은 분이 돌아 가셨으니 누구에게 의지하지...” “ 정신적인 지주였는데...” 하나같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삶을 살다간 이들도 있다.

어떠한 삶을 사는지는 자신의 몫이다.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는 가도 자신의 몫이다. 그러나 살면서 쌓은 베품의 공덕은 많으면 많을수록 하느님 앞에 짊어지고 가는 그대의 발걸음이 가볍지 않을까. 또한 남은 이들에겐 더 없는 교훈이 될 것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은 바로 그대에게 선(善)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천사일지도 모른다. 오늘 그대에게 오는 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주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들에게 비추소서. 아멘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임 루시아/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2008.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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