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한국 근대에 탄생한 민족 종교 세 가지가 있다.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다. 천도교와 증산교는 이대 또는 삼대 이후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였고, 원불교만 아직까지 분열 없이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 백년 전에는 신흥종교였던 이 종교들은 종교연구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과연 대를 거듭하면 창시자와 창시자의 가르침이 일상화(routinization) 되는 것인지, 아니면 신격화되는 것인지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아직 살아 있고, 많은 현상들이 현재 진행형이다. 이처럼 좋은 교과서가 어디 있는가?

흥미로운 신흥종교

이처럼 짧은 역사 안에서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종교들에 대하여 나와 같은 외부자들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만일 이 세 종교 가운데 어느 하나가 자신의 교조(敎祖)를 신격화한다면 즉각 비판적 이성이 발동할 것이다. “그대들의 눈이나 우리 눈이나 다른 게 없는데 우리 눈에는 자연현상이자 상식인 것이 왜 그대들에게는 초자연적이고 계시인가,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인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공격당하는 것은 물론 머지않아 텔레비전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 종교의 실상을 파헤치는 잠입 르뽀까지 등장할 것이다.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신흥종교의 광란’, ‘어처구니 없는 사이비 종교’ 등으로 낙인 찍힐 것이다.

종교학자는 그래도 중립적이겠지만, 종교사회학자, 역사와 전통을 가진 종교에 소속된 많은 신자나 성직자들은 공격적일 것이다. 언론에다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검증과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이들의 집중 포화를 견뎌낸다 하더라도 군소종단으로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종교들이 기존의 큰 제도종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 현장에 나온다고 하면 끼워주지도 않을 것이다.

참고로 한국에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에 육대 종단(가나다 순으로 개신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이 참여하고 있고, 이들 외에 수백 개에 종교가 있다. 2005년 인구센서스 결과를 보면 육대 종단에서 원불교, 유교, 천도교, 나머지 수백 개의 종교를 포함해도 종교 인구의 2%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백 개 종교 가운데는 교주를 신으로 보는 곳은 물론,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교리들을 가진 곳들이 많다. 그런데 워낙 교세가 작고, 영향력이 적다 보니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종교계에서도 명함을 못 내민다.

서로 다른 잣대

이렇게 동시대를 살아가거나, 추적 가능한 가까운 과거에 시작된 종교들에 대하여는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상식이다. 소위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다. 더러 이성을 초월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를 경험한 사람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에게는 신적이고 초월적인 현상과 인물이 현대에 와서는 남에게는 철저히 상대화된다.

그러나 역사가 오래고 이미 여러 면에서 확립되어 있으며 세(勢)까지 확보하고 있을 때는 이런 태도를 취하기 어렵다. 이런 종교들은 적어도 천년 이상 되었고, 교리화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현실에서도 소위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다. 게다가 내부에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이들도 수두룩하다. 만일 이들을 함부로 건드렸다간 험한 일을 당할 걸 각오해야 한다.

학자들도 비교종교학이나, 공격을 의도하지 않은 순수 사회과학적 연구만 해야지 만일 교리를 건드리고 비판적인 의도를 드러내면 역시 이런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그랬다면 파문을 피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개명천지에 어찌 그런 일이…” 라고 생각할 테지만, 태양이 밝다고 사람 눈이 다 밝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종교, 무슨 걱정거리

며칠 전에 내게 이런 일과 관련한 두 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내게 교리를 배운 지인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는데 그가 내게 전화를 한 일이다. 요즘 인터넷 때문에 그는 나보다 한국 사정에 더 밝은 것 같다. 그가 한겨레신문에 나온 어느 신부님의 기사를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의 반응을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하자 캐나다와 한국을 비교하며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점심도 못 먹었다. 만일 그런 일이 캐나다에서 일어났다면 잠잠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친구의 이야기였다.

또 하나의 사건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수녀님이 내게 조심스럽게 역시 같은 기사를 보았노라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물었다. 참고로 이 수녀님은 그 신부님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즉답을 피하고 수녀님께 되물으니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셨다.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에요. 이분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배운 분들도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 아니에요.…” 영향을 받은 이들이 다시 재생산될 것이니 앞으로도 계속 이런 불씨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분이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독자들은 아실 것이다. 대체로 만나지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선정적인 언론에 노출되면 전후좌우 생략하고 몇 단어, 또는 특정 문장에 눈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평소 입장에 따라 친절하게 더 살펴볼 의사 없이 변죽을 울려대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교조화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순교를 불사하고 달려들지 모른다.

어떤 비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종교

필자도 그분의 영향권 안에 있고(석박사 과정에서 그분이 개설한 과목을 이수하였다), 평소 고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던 터라 몰면 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지하게 공부하는 학인, 학자, 상식 있는 신자라면 공부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론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언론의 생리를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 제할 것은 제하고 본다. 물론 기사가 본질은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다른 이들에게는 객관적인 칼날을 들이대면서 자신에게는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필자는 어떤 비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종교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경험 안에서 필자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종교 비판이론들에 비춰 나의 신앙과 종교를 검토해보았다. 이 과정에서 많이 단단해지고 신앙도 좋아졌다. 이처럼 안팎에 있는 비판 혹은 비판자들을 잘만 받아들이면 이것이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하고 성장시킨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 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늘 남의 종교에 대하여 객관적이듯이 말이다.

박문수/ 프란치스코, 가톨릭대학 문화영성대학원 초빙교수, 평신도 신학자 
            200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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