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봉건 사회의 신분 질서가 대물림 되듯이 자본주의 경제 질서 속에서도 소위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어떤 ‘지위’가 대물림된다는 것이 칼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생각이었던 듯 하다. 전태일로 인하여 발화된 노동 운동이 제 꼴을 갖추어가기 시작하던 1970년대 한국에서는 그것과 비슷한 개념인 ‘계층론’이 회자된 바 있고, 우리는 김민기의 노래 (예를 들면 대체로 송창식이 부른 바 있는 ‘강변에서’ 같은 노래들)와 조세희의 소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겠다)등을 통하여 계층론의 현실태를 깊이 공감하곤 했었다.

헌데 내가 처음 연극을 시작하던 1990년 어간은, 대우의 옥포 조선이나 현대 자동차 등 거대한 사업장의 노동조합이 참으로 장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고, 소위 ‘명동 넥타이 부대의 스크럼’으로 설명되는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의 꿀맛을 보고 난지 얼마 안 되었으며, 말하자면 매우 ‘세련된’ 방향성으로 국민의 결집을 이루어내고 있던 황금기였기 때문에 모호한 낭만주의에 불과한, 그래서 행동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계층론’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로 잊혀져가고 있었다. 허나 아니었다.

참으로 슬픈 경험

나는 극단에서 참으로 슬픈 경험을 하곤 했었던 것이었다. (미리 말해 두자면 당시 내가 활동하고 있던 극단은 매우 유명한 노동자 극단이었고 그 극단 출신들 중 몇몇은 지금 엄청나게 유명한 배우가 되어 있다)

나와 동갑인, S대를 나오고 매우 잘 생겼으며 소위 모성본능을 불러일으키게 생긴 L모라는 친구는 매우 술을 잘 마셨고 달변이었다. 동시에 나는 S대를 나오지 않았고 매우 투박하게 생겼으며 술은 잘 마셨지만 입만 열면 아랫도리 패설로 점철하는 인간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느 날인가 연습이 끝나고 다음날 새벽까지 술을 마신 날이었다.

그 때 이미 나이가 삼십이던 그 친구와 나는 아침에 출근해서 동시에 구역질을 해 댔으며 몹시 괴로워했었다. 그리고 이내 후배들(극단에는 여자들이 꽤 많았다)이 괴로워하는 우리들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괴로워하는 L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모두들 마치 선친의 와병을 지키는 큰 딸들처럼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머. 어떻게 해. L형좀 봐. 너무나 괴로우신가봐.”
“난 몰라. 형 아프면 어떻게 해.”
“형. 해장국 시켜 드릴까요? 빨리 속을 푸셔야 해요.”
“야. 그러지 말고 빨리 나가서 약 좀 사와.”......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분량, 아니 엄청 더 많이 괴로워하는 나에게 (왜냐하면 내가 훨씬 더 마셨으니까)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형은 뭐 하시느라고 L형을 이렇게 만드신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퍼 먹이신 거예요. 예?”
“L형은 몸이 약하잖아요.”


돼지사슴론

그것은 숫제 절규였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도 술 때문에 속이 불편할 수 있다는 매우 기본적이고도 분명한 사실을 저들은 인식하지 못 하는가’
‘눈 작고, 털 많고, 덩치 큰 인간의 간은 무쇠로 되어졌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저들의 믿음은 신앙인가 아니면 이데올로기인가..’
억울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조금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부터 내가 후배들에게 술만 취하면 떠드는 얘기가 있다.

“야... 이 치사한 잡종들아. 잘 들어. 지금 돼지를 잡고 있다 이거야. 그런데 곧 죽어갈 그 돼지가 눈동자를 처 올리고 너를 쳐다본다 이거야. 느낌이 어떨 거 같냐. 엉?”
“그거 흉하겠지요.”
“어떻게 흉한데”
“돼지는 눈이 탐욕스럽지 않습니까. 아마 빨리 죽이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키득키득..”
“그러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다고 어떤 친일 할머니가 쥐 떠든 그 사슴인가 하는 짐승이 목에 비닐이 걸려서 죽어가고 있다. 이거야. 그건 느낌이 어때?”
“아무래도 불쌍하겠지요.”
“그러니까 네 놈들은 잡종인 거다. 네 놈들이 죽이고 있는 돼지의 눈은 탐욕스러워 보인다고 적개심을 걸어 보이고, 먹는 건 줄 알고 미련스럽게 비닐을 삼키고 죽는 사슴은 불쌍하다 이거잖아. 그게 인마 내 ‘돼지사슴’론의 골자라는 거야. 알았어? 이 쭉쟁이같은 놈들... 조만간, 다른 그 무엇보다, 골격을 감싸고 있는 고깃덩어리의 형태로 사람을 재단하는 시대가 올 거다. 암 오지 않고...” (소름이 돋는다. 나는 분명 이런 말들을 자주 했고 지금 바로 그런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내게 무슨 예지 능력이 있어서가 절대 아니다. 그저 술주정이었을 뿐)

아무튼 돼지는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결국 - 증오 어린 눈빛을 던지는 것 때문에 더욱더 그 죽음을 기꺼운 것으로 여기는 - 사람들의 손에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슴은 슬픈 눈망울을 어안처럼 뜬 채로 사자의 목에 질질 끌려가며 연민지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손 대대로 불변일 듯 하다. 말하자면 계급, 혹은 계층론이다.

수능시험 현장을 보면서

종부세가 실질적으로 폐지되면서 드디어, 너무도 오랜만에 그 ‘계층론’이 현실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 나는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친구 녀석은 예상 외로 수능 성적이 잘 나온 딸네미를 자랑하고 있었고 한 후배는 자기 딸이 수능을 망쳤기 때문에 수시를 봐야 하니 형이 논술 좀 도와달란다. 물론 도와줘야지... 갑자기, 수능이 치러진 13일 저녁, 수능시험 현장을 스케치한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난다.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의 ‘오금이 저린’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수험생 수송 오토바이’를 기다리고 있는 모녀의 장면이 지나고 다음 장면... 선배를 응원 온 어떤 녀석들이 뭔 도표를 들고 있다. 내용인 즉 수능의 등급수가 마누라의 얼굴을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1등급은 김태희, 2등급은 아무개...(끝까지 보지는 못했으나 6등급 정도에 아마 신봉선이 있었겠지...) 동시에 매우 가열 찬 어조로 ‘등급수가 색시의 얼굴을 결정한다’ 하고 떠들고 있었다. (그 녀석들은 김태희가, 어떤 돈 많은 인간하고 이미 결혼한 사실을 모르나?)

햐...... 이거 어쩌지?
그럼 내 딸은... 6등급 맞은 석두(石頭) 녀석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럼 그 머리가 강철같은 사위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건 그렇고.....
아 근데 이 녀석들이 왜 불나방처럼, 스스로 ‘계층’의 비극 속으로 달려가려는 거지? TV에는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있다는 한 고등학교 건물의 전경이 나오고 있었고 내 눈에 그것은 매우 음험한 복마전처럼 보였다. 참으로 미안하게도...

/변영국 2008.11.21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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