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수녀의 이콘 응시]

 

언뜻 보아서는 많은 부분이 훼손 되어 형태가 잡히지 않는 듯하지만 얼굴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이콘 앞에 앉으면 알 수 없는 경의로움에 사로잡힌다.

그분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위엄이 넘치면서도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 같다. 내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은 모멸감으로 한바탕 신세타령이라도 하고 싶을 때, 이 이콘을 바라보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아도 내 존재의 약함을 이미 알고 바라보는 듯,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그분의 듬직한 어깨에 기대고픈 구세주 그리스도이다. 그 분의 사랑(愛)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보고 또 보노라면 느껴질 것이다. 이 이콘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랑! 거의 500년이 넘었는데도 변함없는 그분의 사랑이 느껴져 옴은 바로 그린 이의 기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도라는 물감

이콘을 그릴 때 우린 두 가지의 물감을 사용한다고 한다.

첫 번째 물감은 자연석을 갈아 만든 천연 안료이고, 두 번째 물감은 기도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콘이라도 기도가 빠져 있으면 그저 복사한 그림으로 남을 뿐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을 바라볼수록 하느님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는 기도라는 물감을 어느 누구보다도 진실되게 사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콘을 그리다 보면 분심 잡념이 사라지고 오직 그 성인에게로 향하는 기도와 마음만이 남게 된다. 내가 이콘의 매력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눈을 아주 깊게 바라 본 적이 있는가?
그저 ‘뚫어지게’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깊~게, 그의 동공 넘어, 내면 깊숙이에 숨어 있는 약함까지도 바라보는 깊이 말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매일 마주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을 때도 많고 고개는 끄덕이며 반응하는 듯하지만 머릿속에선 다른 세상으로 가득 차 실상 상대방의 말은 귓전으로 흘릴 때도 있고.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무엇을 보는 듯 시선이 흐려져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나로 인해 행복해 질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되지 않을까.

살인청부업자, 또니

몇 년 전 선교지에서 만난 한 청년이 있다.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를 그의 구원을 위해, 살아 있다면 회개를 위해, 그분의 눈빛에 그를 맡기곤 한다. 그는 우리의 사랑없음과 무관심이 낳은 이웃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인다.

온두라스라는 나라는 나에겐 왠지 칙칙한 뒷골목의 느낌이다. 산 베드로 슬라市의 산호세라는 작은 마을에 내가 있은 보름동안 거의 매일 비가 내려 거리는 늘 진흙창이 되고 저녁이 되면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춥고 배고팠던 것 같다. 밤이면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이 아편을 복용하고 지나가는 차에 뛰어들기도 하는 무법지대처럼 변해 버리고, 아침이면 퀭한 눈의 그들이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곳에서 온 몸을 문신으로 도배한 또니라는 청년을 알게 되었다. 어느 집의 페인트칠을 도와주고 있는데 또니가 들어오며 인사를 하기에 슬쩍 눈만 마주치고 붓을 놓지 못하여 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잠깐 사다리에서 내려와 정식으로 손을 내밀어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생각보다 더 작았던지(ㅋ 나의 키는 147Cm) 앉은 상태에서도 키를 재는 녀석. 선한 눈과 깔끔한 이미지의 꺽다리 녀석이 자기를 소개하는데 벌써 결혼하여 딸이 있단다.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자기를 젊게 봐준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뭐하냐고 물으니 살인청부업을 한단다.????? (이 직업을 이렇게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까) 사람을 대신 죽여주는 일이냐고 다시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는데 난 계속 고개만 갸우뚱 거리니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여주는 총!!! 난 총을 보자 웃었다. 오히려 또니가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웃은 것은 너무도 천진하게 생긴 녀석이 정말로 끔찍한 흉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총이 무겁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또니를 향해 쏘는 시늉을 하며 이거냐? 하니 당황하듯 총을 돌리며 그렇단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난생 처음 아니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살인청부업자와 마주 앉아 나는 다음 대화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리다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그 위험한 일을 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하겠냐고 물으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단다. 오직 죽여야 할 사람을 잘 죽이면 그것으로 끝이고 사랑하는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죽여야 할 대상을 무사히 잘 죽일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그의 말에, 참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너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그 일을 한다면 너로 인해 죽은 그 사람의 가족은 얼마나 슬퍼하겠냐고 물으니 그것도 중요하지 않단다. 오직 자신의 가족만 중요하다는 또니! 지극히 이기적인 이 청년을 바라보는 내가 왠지 기운이 빠졌다. 세상이 차갑고 어지러울 수밖게 없는 이유가 바로 너 때문이구나 라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어깨를 멋쩍게 올리는 그가 안쓰럽기도 하였다.

태어나면서 부터 한 번도 사랑받아 보지 못한 이 청년은 처음으로 한 여자로부터 사랑을 받아 보았고 가족이라는 둥지를 갖는 행복을 느낀 것이다. 자신의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 주겠다며 셔츠를 올리는데 박힌 총알을 꺼내기 위해 수술한 자리를 가리키며 친절히(?) 설명해 주는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얼마 전 총알을 뺀 곳이라며 보여 주는 곳은 무릎 쪽이었다.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에 비상약으로 가져갔던 후시딘을 발라주려 하자 한사코 사양하는 그의 손을 때려 가며 겨우 약을 바르고 있는데 갑자기 토마스 신부가 나를 낚아채듯 끌고 가는 것이다. 황당하고 놀라 바라보니 저 녀석이 누군 줄 아냐고 화를 내며 약 묻은 내 손가락을 흔드는 것이다. 이미 여러 명의 사람을 죽였고, 마약 판매자에 마약 중독자이고 어쩌면 에이즈 환자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의 상처에 손을 댄 나의 갈라진 손가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갑자기 겁이 났다. 당시만 하여도 에이즈에 대한 짧은 지식 때문에 순간 몰려오는 두려움이 더욱 컸다. 그러나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선교사는 하느님께서 직접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던 터라 마저 약을 발라주며 밴드를 붙여 주었다. 고마워 하는 그가 신부의 눈치를 보며 다음에 자기 가족을 소개하겠다며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갔다.

그날 저녁 성무일도를 바치려다 책 갈피에서 떨어진 이 이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위로 겹치는 또니의 모습. 한참을 바라보다 뇌인 말은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였다. 이후 성무일도를 펼 때마다 짧게나마 또니가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함께 바쳤다.

내가 매순간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았던 사랑이 바로 또니와 같은 사랑의 불구자를 만든 것은 아닐까.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도 서슴치 않는 그를 훌륭한 가장이라고 해야 할까?

비뚤어진 사랑의 방식이 세상을 더욱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이기적이고 부정하게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자신만이 늘 정의롭고 곧고 착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어쩌면 우리 또한 사랑의 불구자일지도 모른다. 이 이콘을 바라보면서 결핍된 내면의 사랑이 그분의 진실성 어린 눈빛으로 채워져 지금 바로 옆에 있는 그가 나에게 먼저 미소를 보내기를 기다리기보다 용기있는 내가 먼저 따뜻한 미소, 말 한마디 건내면 어떨까.

때로는 용기있는 사람이 먼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임종숙/ 루시아,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2008.11.17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