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씨팔, 이거 내 약 맞어? 씨팔!" 김 씨는 말끝마다 ‘씨팔’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씨팔‘일까? 화가 나서 씨팔인지 억울해서 씨팔인지 그의 눈빛만 봐도 안다. 오늘은 입으로만 씨팔이지 눈빛은 기가 죽었다. 오른쪽 눈 두덩이의 시퍼런 자국을 보니 누구와 한판 붙었든지 아니면 무전취식으로 밥값을 치룬 게다.

“파란 거 네 개, 노랗고 큰 거 세 개, 분홍색…….” “됐어, 씨팔!” 내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약 봉투를 확 낚아챈다. “먹고 콱 뒈지는 약 없어? 씨팔!” 절뚝거리며 문 쪽으로 휑하니 사라진다.

심성 고운 스물다섯 살 청년이 '공공의 적'이 되기까지

▲ 삶은 나에게 왜 이리 가혹한가? 그래도 여린 심성 한 가닥 남아 있는데...ⓒ박홍기
김 씨의 고향은 전북 익산. 그날을 잊지 못한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성실한 공무원이던 아버지, 어머니와 두 동생, 대학생 김 씨의 단란한 가족은 할아버지 생신 잔치에 간다고 집을 나섰다. 이리역에 막 들어서는 순간 천둥 같은 굉음이 천지를 진동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다. 대신 한쪽 다리와 가족을 잃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관통한 그의 뇌는 그를 딴사람으로 만들었다.

스물다섯 살의 침착하고 온순한 청년은 폭력과 쌍욕으로 동네에서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고의 충격으로 인한 뇌 손상이었다. 큰 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동안 그의 난동에 집안은 살얼음판이었다. 어느 날 가출해서 반년 만에 집에 와 보니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조카의 횡포에 큰아버지가 몰래 이사를 간 것이다. 온순하고 성실했던 그를 아는 동네 사람들도 몰라보게 달라진 그에게서 돌아섰다. 고향을 떠나 그가 흘러 들어간 곳은 서울역 뒷골목이었다.

술과 싸움으로 서울역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날 이러다가 인생이 영영 끝나는구나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우연히 알게된 노숙인 안 씨의 소개로 미군 부대에서 빼낸 물건을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대주는 일을 했다. 돈을 꽤 잘 벌었다. 미군 부대의 유 대령과 거래를 했는데, 어느 날 크게 ‘한탕’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동안 번 돈에다 여기저기서 빌린 돈까지 몽땅 유 대령에게 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유 대령이 도망간 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분에 못 이겨 몸에 휘발유를 부었다. 운이 좋았는지 오른쪽 발가락 다섯 개가 새까맣게 탔고 절름발이가 되었다. 복수의 칼을 갈았다. 유 대령을 찾아 서울을 이잡듯이 뒤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하는 유 대령을 붙잡았다. 긴말이 필요 없었다. 품고 다니던 식칼로 그의 배를 있는 힘을 다해 찔렀다. ‘난도질’을 하려는데 유 대령의 ‘새끼 셋’이 퍼뜩 그의 눈앞을 스쳤다. 복부 파열로 응급실로 실려간 유 대령은 겨우 목숨은 건졌다.

오히려 교도소는 지친 그를 쉬게 해준 고마운 곳이었다. 천성이 고운지라 마음을 잡고 교도소에서 배운 도배 기술로 아파트 공사장을 따라다니며 새 생활을 시작했다. 공사장 사람들은 인정 많고 성실한 그를 좋아했다. 단 한 사람 ‘꼰대’만은 그를 탐탐치 않게 여겼다. 김 씨가 웃대가리들의 눈에 들어 정식 사원으로 갈 거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꼰대의 질투심은 김 씨 죽이기 작전으로 들어갔다. 동료들도 꼰대가 베푸는 선심과 함께 꼰대의 모함과 학대에 하나둘 동조하기 시작했다. 김 씨의 폭력 전과는 그를 상종할 수 없는 나쁜 놈으로 몰고 갔다. 억울했다. 억장이 무너졌다. 모두 김 씨를 따돌렸다. 어느 날 실컷 술을 퍼마시고 숨어서 꼰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몇 대를 더 갈기자 피를 토하고 늘어졌다. “죽었어!” 누군가 소리쳤다.

루시퍼 효과 … "썩은 사과가 아니라 썩은 상자가 문제"

김 씨가 노숙인 무료 진료소에서 타 가는 약은 신경안정제, 우울증 약, 간질 약, 수면제, 정신분열증 약이다. 일종의 정신적 ‘안정’을 위한 약의 종합 세트다. 요즈음 김 씨의 ‘씨팔’이 쑥 들어간 걸로 봐서 약을 꼬박꼬박 잘 먹고 있다는 증거다. 게다가 정중하기까지 하다. 아마 풋풋했던 25세 청년 김 씨의 모습이 이랬지 않았을까.

심리학에서 ‘루시퍼 효과’는 신이 가장 사랑하는 천사였지만 악마로 전락한 ‘루시퍼’의 이름을 따서, 김 씨처럼 평범하고 착한 사람도 특정한 상황에서 악하게 변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김 씨가 씨팔을 내뱉고 눈을 부라릴 때마다 “썩은 사과(개인)가 아니라 썩은 상자(제도)가 문제다”라고 강조한 정신과 의사 짐바르도 교수의 ‘루시퍼 효과’를 떠올린다. 세상이라는 상자 속에 함께 사는 사과들인 우리들, 김 씨와 나 사이에 나의 현실과 그의 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무관한 ‘그만의 현실’이란 없는 것이다.

노숙인 진료소의 ‘안정제’와 같은 약은 현실의 고통 앞에서 내가 김 씨와 나누는 소소한 연대 중의 하나다.이 작은 연대를 통해서 우리는 서로 위로와 사랑을 깨우치고 발전시켜 비록 현실의 썩은 사과 상자 속에 든 약한 사과들이지만, 자신을 더 이상 썩지 않게 지켜내고 기어이 건강한 사과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 씨의 ‘씨팔’이 내게는 욕설이 아닌 애교와 투정으로 들리는가 보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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