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도가적인 풍모를 지닌 강호의 무림고수 세 명이 배를 타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채, 비파를 뜯으며 노래를 부른다. 소오강호(笑傲江湖)-강호를 웃다, 세상을 비웃다... 영화 <소오강호>의 도입부에 흐르던 주제곡과 영상은 미려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순간, 우리 몸이 죽어 영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에 세상의 모든 회한과 작별하며 불러봄직한 노래였다. 지독하게 들끓었던 사랑의 감정이나 미움이 휘몰아쳐 이성을 잃고 그 물결에 휩쓸렸던 무참함을 위로받는 영상이었다.


웃을 줄 몰랐던 내 안의 소심증

연극 <웃음의 대학>을 보고 나오며 떠오른 영상이, 바로 90년대 초반에 본 영화 <소오강호>였다. 웃을 줄 몰랐던 내 안의 소심증, 웃음을 빼앗아간 강호(江湖)의 사악함을 향해 동방불패의 임청하처럼 머풀러 한 장으로 모두를 제압하거나 소호강호를 부르며 도사처럼 웃어야 했건만...

모처럼 하루의 시간을 내어, 친구와 연극을 보고 대학로를 걸으며 호떡과 풀빵을 사먹고 맥도널드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가을비에 젖어가는 가로수들을 내려다보았다.

1940년대 전쟁 중인 일본, 극단 <웃음의 대학>에 소속된 전속작가는 웃음을 잃어버린 소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희극집필에 몰두한다. 그러나 군국주의 일본은 검열관을 시켜 작가의 희극에서 웃음을 제거하고자 한다. 희극에서 웃음을 제거하려는 검열관은 사람들 삶에서 웃음을 빼앗으려는 파시즘 체제를 대표하는 존재로서, 마치 중세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에 해당하는 <희극론>을 금서로 정하고 이 금서에 접근하는 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책의 겉장에 맹독을 발라놓았다는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의 속의 수도원장을 떠올리게 한다.

담당 검열관(송영창 扮)은 이런 전쟁의 시대에 희극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삶의 기쁨을 표현하는 웃음이 수도원이 지향하는 신앙심을 훼손하는 비열한 행위인양, 처절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감추는 수도원장은 시대를 달리해서 태어난 쌍생아이다. 수도원을 지키기 위해 젊고 이지적인 수사들을 죽음에 몰아넣는 수도원장처럼, 검열관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퍼트리는 극단 <웃음의 대학>의 문을 닫게 하기 위해 대본을 트집잡으며 작가에게 대본수정을 요구한다. 그러면 작가는 공연허가를 얻기 위해 검열관의 무리한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며 수정하는데 대본은 오히려 점점 더 재미있어지며 완성도를 더해 간다.

웃음을 통제하는 파시즘의 어이없는 통치

예를 들면, 본래 제목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검열관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지는 햄릿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라는 요구에, 작가가 대본 속에서 로미오의 이름을 햄릿으로 바꿔 다시 검열을 신청하면 검열관은 대사 가운데 '천황폐하만세!' 를 넣으라는 요구로 맞선다. 이에 작가는 햄릿이 타는 말의 이름을 '천황폐하만세' 라고 짓는 등, 검열관의 경직된 명령에 작가적 재능을 발휘한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대본의 희극성에 점점 흥미를 느끼는 검열관은 차츰 작가와 함께 희극대본 수정에 빠져든다. 이러한 검열관의 페이소스와 아이러니를 통하여 연극은 웃음을 통제하는 파시즘의 어이없는 통치를 비웃는 것이다. 그래서 대본이 완성되어 공연허락이 나올 시점에서, 검열관은 작가보다 더 간절히 연극공연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작가의 징집유예를 지시하지만 작가는 전쟁터로 떠나야만 한다. 이에 검열관은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서는 안된다며 대본을 무대로 올려 소시민에게 웃음을 돌려줄 수 있도록 꼭 살아 돌아오기를 부탁한다.

배우 황정민이 작가로, 송영창이 냉정한 검열관으로 나오는데, 두 사람 모두 정상급 연기자들로 관객들에게 충족감을 안겨주었다. 다만 작가로 분한 황정민에게서 예민하며 독자적인 작가의 모습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극단에 소속된 작가라서 그런 것인지(?) 조직에 매여 그 안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작가의 캐릭터였다. 나름대로 괜찮았고 한편 아쉬웠다. 검열관 역의 송영창도 괜찮았지만 원래는 문성근이 맡기로 한 배역이었다니 문성근판 검열관도 재미있었을 것 같았다.

아쉬운 점으로는 처음 도입부에서 검열관과 작가는 까마귀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전체 줄거리와 별 상관없어 보이는 까마귀 이야기에 중간중간 십자매와 비둘기 이야기가 얽혀지는데, 아둔한 나로선 그 의미가 읽히지 않았다. 웃음을 통하여 사람들은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새처럼 가볍게 날 수 있다는 은유라면 전체 이야기와 좀더 유기적인 연결을 유도했어야 했다. 좀 지루하게 이어지는 대사들도 쳐내고 산뜻한 다른 표현방법을 찾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고.


웃음, 자유로운 영혼의 행복

<웃음의 대학>은 미타니 고우끼가 1940년대 일본의 파시즘을 비판하며 쓴 작품으로 일본에서는 물론 서구에서도 인기를 모은 작품이며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파시즘에 민감한 우리 세대가 이 연극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은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일 것이다. 맑시즘 혹은 종교가 권력이 되어 사람들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아이러니를 경계하는 책들이다. 연극 <웃음의 대학>은 이러한 텍스트의 주제를 일본의 군국주의에서 찾은 듯했다. 그래선지 스토리에서 주제가 샘솟는 게 아니라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스토리를 짜맞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웃음이란 무엇이길래 일본의 전체주의자들은 희극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웃음, 웃을 수 있는 여유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일 것이다. 파시즘의 우두머리들과 중세의 지배자들이 웃음을 경계하고 경직된 규범을 통치수단으로 삼은 건, 웃음이 경계를 허무는 포용력과 자유로운 정신을 배양하는 에너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이상한 이야기, 예수님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유언비어는 큰 웃음으로 마주해야할 미신이 아닌가.

이 연극이, 아니 연극이 우리를 극장으로 유혹하는 것은 살아있는 배우들을 통하여 이야기를 듣는 묘미일 것이다. 어쩌다 희곡을 쓰다 제작비 제로상태에서 제작까지 겸해 배우, 스탭들을 고생시키고, 나도 여러 번 병원에 실려갈 뻔했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무대에서 배우들이 인물을 형상화시키는 걸 지켜보면, 글로 그려진 캐릭터가 사람이 되어 움직이는 무대에 혼을 잃고 한국가톨릭의 이름으로 <벤허>를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 다시 성당 무대를 찾겠다는 맹세를 하곤 했다.

연극 한 편을 통하여 우리 사회는 아니 나는 웃음을 통제하던 단계에서 벗어났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연극인들-예술가들의 노고를 통하여 이전의 기억들을 불러내 사유의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소오강호>를 부르며 마음의 여유-자유를 만끽하는 하루였다.

/이규원 200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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