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버스, 쌍용 자동차 해고자와 함께 하는 '85호 크레인 성당 주임 신부'
16일 토요일 낮 1시 여의도에서 대한문까지..쌍용차 행사 참여 호소

수원교구 공동선실현사제연대가 주관한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삶을 위한 세 번째 미사'가 있었던 지난 13일 저녁 평택역 앞, 천막 분향소를 지키던 해고노동자들과 와락 센터의 가족들이 함께 하는 소박한 자리 한 쪽에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있었다. 부산 대현동 장애 아동 센터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서 신부는 틈이 날 때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분향소가 차려진 대한문 앞으로, 평택으로 달려간다. 현장에서 원하는 신자들이 있으면 그 곳이 어느 곳이든 몇 명이 모여 있든 상관없이 작은 제대를 준비해 미사를 봉헌하기도 한다.

▲ 6월 13일 평택역앞에서 봉헌된 쌍용차 미사를 공동집전하고 있는 서영섭 신부(맨 오른쪽)ⓒ배지희

세 번에 걸친 희망버스가 활발히 부산 영도를 향하던 2011년 여름, 서 신부는  ‘85호 크레인 성당 주임 신부’라고 불리웠다. 그는 스스로 이 별칭이 고맙고 영광스럽다고 했다.

“3차 희망버스가 오기 전 2.5 희망버스 때였다. 토요일부터 1박2일로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신자들이 미사를 봉헌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사에 가던 한 사제는 길거리에서 다친 사람을 발견하지만, 그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가면 미사에 늦을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친다. 그런데 한 신자가 다친 이웃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 함께 있어주느라 미사에 가지 못하고 그런 이유로 마음에 죄책감을 갖게 된다면...”

그날, 그는 85호 크레인 앞에서 30여명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시작은 쌍용자동차였다. 2011년 2월 어느 날, 새벽 미사의 강론을 준비하던 서 신부는 쌍용자동차의 16번째 죽음을 전해 들었다. 돌연사였다. 복직 대기 중이었던 희생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부인도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었고 집에는 남매가 부모 없이 남게 되었다고 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억울함이, 그리고 그 억울함에 대한 무관심이 불러온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했다.

강론을 준비하며 서 신부는 망설였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신자들에게 기쁘고 희망찬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덮어 두기에는 너무 시급한 문제였고 외면하기에는 사제로서의 예언자적 소명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신자들의 반응’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새벽 강론에서 서 신부는 그 16번째 죽음을 이야기했다. 미사가 끝난 후 한 신자가 조용히 와서 희생자의 아이들에게 보내고 싶다며 적지 않은 후원금을 냈다. 그는 트위터에도 ‘아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하면 좋겠다’고 글을 올렸고 공지영 작가가 그 글을 리트윗함과 동시에 많은 후원금을 내 주었다.

6월11일 1차 희망버스, '85 크레인 성당 주임 신부'의 시작

▲서영섭 신부는 부산 발령 이후에 한진중공업과 쌍용차에서 희망을 기다렸다.  
서 신부는 부산에 발령을 받고 왔던 2011년 1월 이래로 한진중공업의 소식도 간간히 접했다. 사목하고 있는 시설 근처에 있는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정리해고 철폐를 외치며 연좌농성을 하던 한진 중공업 해고 노동자들도 종종 만날 수 있었고 크레인 점거 농성 소식도 들었다.그렇지만 당시에 그는 첫 소임지의 일을 익히는데 바빴다. 그렇게 지내던 6월 어느 날, 부산에 희망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그는 영도의 85호 크레인 앞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85호 크레인 성당 주임 신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진 중공업은 재무구조가 적자가 아니었고 영업실적도 좋았다. 그런데 계열사에 투자하다보니 자금 압박을 받은 것 아닌가. 기업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은 기업주가 져야 하는 것이다. 왜 노동자들에게 그 책임과 희생을 강요하는가. ‘경영의 긴박한 이유’로 정리해고를 한 것이 아니었다. 쌍용 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회계장부를 조작하지 않았는가”

그는 사람을 쓰다가 버리는 도구로 생각하고 하물며 그런 결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하는 기업과 자본에 분노했다.

1차 희망버스가 부산 영도를 다녀간지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27일, 행정 대집행으로 농성중이던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은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 쫓겨난 노동자들의 모든 집회에는 경찰들의 무차별적 연행이 계속 되었고 상황은 날로 악화됐다.

“한진 노동자들은 2003년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맨 김주익 열사나 곽재규 열사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컸다.  죽을 각오로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을 보며 ‘이 분마저 돌아가시면 회복이 불가능한 큰 상처가 되겠구나’ 싶었다

서 신부는 오로지 사람을 살리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6월부터 10월까지, 그는 85호 크레인에 거의 매일 나갔다.

서 신부는 한진 노동자 신동순 씨가 크레인 중간 지점에서 단식한지 40일째 되던 날에 했던 기도를 기억한다. 그는 “당신은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지만 저 사람은 살기 위해 단식하고 있다"며 " 당신이 지켜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당신의 40일 단식이 힘들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제발 지켜 달라”고 '하늘을 찢고 싶은 마음으로 ' 기도했다. 그날, 신동순 씨가 단식을 풀고 내려와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는 ‘기도의 절박함이 힘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신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지만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제대로 마음을 모아서 기도하는 일이 드물다. 기도는 분명히 강력한 힘이 된다. 그런 확신이 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2011년 여름

▲ 서영섭 신부는 매일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가면서 매일 기도하는 수도자도 이렇게 힘든데 노동자들은 오죽할까 염려했다.
서 신부는 매일 85호 크레인에 나가면서 끝이 안보인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 때, '매일 기도하는 수도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힘든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하는 마음에 ‘나라도 중심을 가지고 살아갈 의지를 보여 줘야겠다’ 생각했다 . 내일 아침 눈을 떠서 변하지 않은 이 상황을 대면할 때 슬퍼지더라도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내겠다고 마음먹었다.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은 그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조바심 갖지 말라”고 트위터를 통해 멘션을 보냈다. “스스로 긴 싸움이라 생각하고 시작했으니 신부님도 여유를 가지시라고, 애를 태우시면 내가 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 신부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깥 분위기에 애가 탈 수 밖에 없었다. 공권력은 강경했고 바로 옆84호 크레인에서는 강제 진압을 위한 시뮬레이션 훈련이 시행되기도 했다. “너무 사랑하게 되면 만나고 돌아서도 또 보고 싶지 않나.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의 상황이 너무 안 좋다보니 수도원에 돌아가면 불안했다. ‘밤에 혹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매일 현장에 나오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 됐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대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계속된 까닭이다. 그러나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병실 창문 밖으로 85호 크레인이 떠올랐다. 멀리 보이는 바다에서는 강정마을이 떠올랐다. '내가 이 정도로 망가지고 쓰러지는데 내가 포기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이 또 들었다. 가야겠다고, 가서 미사를 하고 기도를 하고 함께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퇴원 후에도 85호 크레인을 향한 발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부산 영도로 달려와 준 쌍용자동차 벗들과의 만남

그 크레인 아래에서 연대활동을 위해 꾸준히 부산 영도를 찾아왔던 쌍용 자동차 해고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도 죽을 만큼 괴로운데 ‘우리 문제가 먼저예요’라고 얘기하지도 않고 한진중공업에 힘을 모았다. 서 신부는 그 맑고 선한 사람들의 눈에 쌓여있는 피로감을 봤다. 끝나지 않는 싸움에, 무엇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세상에, 자신들을 힘으로 내려누르려는 공권력에 너무 많이 지쳐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쌍용자동차 해고자이자 그의 벗이기도 한 이가 조용히 옆으로 와서 말했다. “저, 아파요.” 서 신부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서 신부는 그래도 요즘 사회적 관심이 집중이 되고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듯 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이다”라며 “‘벗’이라는 말이 참 좋다"고 했다. "사람은 혼자라고 느낄 때가 제일 힘든 것 같다. 절벽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어느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나는 그저, 그들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려주고 싶다”

그는 평택이며 대한문에서 열심히 연대하는 이들을 보며 " 직장 생활하면서 피곤할텐데 기꺼이 자신의 쉬는 시간을 천막 농성장에서 보내는 이들을 보면 대단해 보인다”며 감탄과 함께 고마움을 표현했다. 서 신부를 만난 날도 서울 상일동에서 온 수키 씨가 미사가 끝난 후 분향소를 지키는 이들의 식사를 책임졌다. 디자이너인 그는 오늘 점심 때도 대한문 분향소 ‘밥 셔틀’ 담당자였다고 했다. 함께 식사를 한 이들이 고마운 마음을 전하자 “16일, 여의도 ‘함께 걷자!’행사에서 만나자”고 밝게 웃었다.

그건, 사랑이었지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사랑,이었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것 같다 했다. “85호 크레인에 인격성을 부여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 내 신앙의 대상들이었다. 내 사랑의 대상이 능멸당하거나 욕보이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막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삶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사랑의 이름으로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인간의 가치를 망가뜨리는 불의, 인간의 존엄을 헤치는 힘, 그런 것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답했다.

사랑해서,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지켜주고 싶어서 좀 더 단단해지고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의 내 약한 모습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지켜줄 수 없으니 기대올 수 있는 넉넉한 어깨와 여유로움, 그리고 마음의 힘을 지니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단단해야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하지 않았어도, 여전히 여리디 여린 나였어도 괜찮았다. 그 모습 그대로 옆에 계속 있는 것도 괜찮았다. ‘내가 여기 함께 있어’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늦게서야 깨달았지만, 그 때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은 오히려 나였다. 사랑 받은 것은 오히려 나였다.

쌍용 자동차 해고자들과 함께 싸우며, 한진 중공업을 향한 희망 버스를 타며, 수없이 많은 이 땅의 울고 있는 이들과 연대할 때, 사랑은, 그렇게 온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내가 그들과 함께 하고자 했을 때 실은 그 연대가 나를 살리고 내 삶을 지키는 힘이 된다.

서영섭 신부는 '훌륭한 사제'가 아니라 강도 당한 이와 함께 한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착한 사제’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살다보면 나의 부족한 부분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메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고.

6월 16일 토요일 낮 1시부터는 "함께 걷자! 함께 살자! 함께 웃자!"행사가 1박 2일동안 열린다. 여의도를 출발해 대한문까지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치며 함께 걷고 대한문 앞에서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연대할 권리'를 외치며 난장을 펼친다. '희망'의 다른 이름인 '연대'를, '사랑'의 다른 이름인 '함께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차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