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시시한 소슬바람]


해에 커튼이 쳐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하늘,
밖으로 열린, 때로 치켜뜬 눈이 안으로 잦아드는 시간.
풀벌레 소리 들으려고 귀를 쫑긋하다 그만 쑥의 열매를 보았네요.
베란다 화분에서 키우는 쑥에 꽃인 듯 보이는 연두빛 알갱이가 맺히더니
단단해져서 지가 쑥이네 씨앗이라고 하는군요.
쑥국 쑥전에 쑥범부리에 먹을 생각만 하던 봄날에는
제 속을 보여주지 않던 쑥이 쓸모 바라지 않고 그냥 키우니...
아니, 내버려두니, 아니 그냥 공존하니, 지 감춰둔 속을 다 보여주다니요.
죽어가는 미스김라일락 옆에도 무지막지하게 이쁜
초록눈알들이 또록또록 날마다 올라온답니다.
라일락에 물을 주는 건지 잡풀에 물을 주는 건지
하여튼 열심히 물 주어가며 바라보며 문득 생각합니다.
‘필요보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 가장 큰 쓰임새’가 아닐까...



밤새 비 내린 아침
옥수수 거친 밑동마다
애기 손톱만한 싹이 돋아났다
지가 잡초인 줄도 모르고
금세 뽑혀질 지도 모르고
어쩌자고 막무가내로 얼굴 내밀었나
밤새 잠도 안자고 안간힘을 썼겠지
온몸 푸른 심줄 투성이 저것들
저 징그러운 것들 생각하니 눈물 난다

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솟아오른 저 작은 생 앞에
우리네 시끌벅적한 생애는 얼마나 엄살투성인가
내가 인간으로 불리기 전에도 내 잠시 왔다 가는
이승의 시간 그 이후에도 그저 그러하게
솟았다 스러져 갈 뿐인 네 앞에
너의 부지런한 침묵 앞에 이 순간
무릎 꿇어도 되겠는가

(김해자, 「스스로 그러하게」)


오늘 아침은 땔감 쌓고 벼논에 갔더니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메뚜기 여치들이 튀어 올라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을 아주 조심스레 내딛습니다
순간 내 걸음이 저들에게 흉기일 수 있겠다 싶었지요.
그리고 나도 몰래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여치 메뚜기 개구리 수수 율무 쑥부쟁이 구절초
벼는 벼답게 누렇게 벼알을 매달고 고개 숙이고 있고
율무는 율무답게 고고하게 서서 단단하게 빛나는 열매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모두가 그다운 향기와 모습이 보이고 
귀가 닿인 곳마다 가장 그다운 소리가 나오는
온 세상이 스스로, 그러한 곳.
누구의 시선이나 누구의 쓸모에 의해 비틀리지 않은
각자 생긴 대로 자기로부터 비롯된,
자연스러운 길이 가장 아름답고 쉽고 편한 길이다,
그러할 때 평화롭고 그 평화가 이어지면 행복이다,
생각이 그 존재고 마음이 그 존재고 평화로운 미소가
모든 생명의 본성이자 목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비의 날개짓과 잠자리의 결혼비행과 온갖 풀벌레소리가 다
존재의 축복을 보여주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모두 구비되어 있다고 알려주는데
우리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찾으며
인생이 충만하길 기다리고만 있을까요.
생에 필요한 것은 눈만 돌리면 다 널려있는데
우리는 어디에 한눈을 파느라고
온 세상에 충만해 있는 평화와 축복을 목마르게 찾아다니고 있는 걸까요.
오늘 이 순간은 이것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숨 하나 평화롭게 쉬는 것에 자족하게 하소서
밥 한 끼 맛있게 먹는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 스스로 그러하게,
안에서 차오르는 생명의 약동으로 솟구쳐
친구에게로 가게 하소서 웃으며 사랑에게로 가게 하소서



김해자/시인,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 로 등단.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와 <축제>가 있다,
현재,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놀면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일도 조금 하고 있다.

/김해자 200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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