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 임의진
야훼여, 이 마음 다 바쳐 감사드립니다!
몸소 하신 기막힌 일들 남김없이 빠짐없이 전하리이다.
당신 생각에 그저 기쁘고 즐거워
더없이 높으신 분 그 이름 찬양합니다.

원수들이 뒤돌아 도망치다가
당신 앞에 거꾸러져 죽게 하소서.
공정하신 판관께서 재판석에 앉으시고
나에게 죄없다 판단하셨사옵니다.
저 민족들을 꺾으시고 악한 자를 멸하시며
그 이름을 영원히 지워주셨습니다.
원수들은 영영 망해버려 흔적도 없고
그 도시들 또한 잿더미 되어
기억조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야훼께서 영원히 왕좌에 앉으시고 재판하실 옥좌를 다지셨으니,
정의로 이 땅을 다스리시며 공정하게 만백성을 판결하시리.
야훼여, 억울한 자의 요새 되시고 곤궁할 때 몸담을 성채 되소서.
야훼여, 당신을 찾는 자를 아니 버리시기에,
당신 이름 받드는 자 그 품에 안기옵니다.

시온에 사시는 야훼께 찬미하여라.
그 하신 일들 만민에게 모두 알려라.
무죄한 피를 갚으시는 분께서 그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불쌍한 이의 울부짖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

야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원수들에게 당하는 이 억울함을 살피소서.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끌어내소서.
구해 주신 그 일을 한껏 기뻐하며
아끼시는 이 수도 시온의 성문에서 끝없이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저 민족들은 저희가 판 구덩이에 빠지고 저희가 친 덫에 걸리리라.
야훼께서 공정한 재판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시고
악한 자는 자기가 한 일에 걸려들리라.
하느님을 저버린 저 민족들, 죽음의 나라로 물러가거라.
악인들아, 너희도 물러가거라.

가난한 사람, 아주 잊혀지지 아니하고
억눌린 자의 희망, 영영 헛되지 아니하리라.
야훼여! 일어나소서. 사람이 우쭐대지 못하게 하소서.
저 민족들로 하여금 당신 앞에서 심판받게 하소서.
야훼여! 저 민족들을 혼내 주시고 스스로 사람임을 깨닫게 하소서.

(시편 9장)

이른 무더위 끝 소나기가 투둑투둑 떨어지자 일제히 꽃나무는 잎사귀라도 물에 젖어보려 곰지락거리는 중이다. 하늘의 다디단 위로가 필요한 자들, 그러니까 고난 받는 자, 가난한 자, 박해 받는 자, 연약한 자들은 풀죽어 가만히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튼튼한 어금니를 가진 사람들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야. 이빨이 송두리째 빠지면 비빔냉면, 물냉면을 씹지 않고도 후루룩 마시면 되지, 뭐.

금이 간 범종처럼 검게 깨트려진 노동자들, 중노동에 온몸이 뻐근하고 아리는 이집트 노예의 후예들, 보기만 해도 쩨깐한 것들, 헛헛하고 미미한 것들, 그들 오클로스 밑바닥 백성들, 야만과 폭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마지막 의지할 수 있는 분이라고는 오직 주님 한분 뿐! 용기를 내어 삶의 마지막 희망을 만지면서 당차게 내지르는 목소리. 그런 격정이 녹아있는 야물딱진 시 한편!

분꽃 씨앗은 땅의 품에 몸을 감추고 한동안 없는 듯, 쥐죽은 듯 살았다. 지난달 뿌린 까만 분꽃 씨앗, 언제 몽긋거리며 올라오려나 짐짓 기대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라! 저 분꽃 어린 잎싹, 분꽃이 싹을 틔우고 있지 않은가. 눈물샘 다 마른 사람들 대신하여 울어줄 장마가 지나면 또 우리를 대신하여 환하게 웃어줄 분꽃이 대기중이다.

시편은 일관되게 정의를 언급할 때, 반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우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 보호와 소소한 행복을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폭풍우 장맛비 이후의 푸르고 화창한 대지를 무지개 거울로 비추어 주시며, 새롭고 뚱딴지같은 꽃세상의 구원을 속삭여 주신다. 분꽃 한송이에도 그런 신비가, 그런 변혁의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주님은 완벽하고 고귀한 신분을 곁에 두시기보다 가엾고 위태로운 친구를 구원하러 찾아다니신다. 그치지 않을 비는 없는 것이라고, 결국은 장맛비도 소낙비에 불과한 것이라고, 무거운 우산을 든 채 살아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시는 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비 맞아 떨고 있는 친구를 우산 속으로 어서 받아들이라는 충고 한 말씀……. 이 영적 빈곤과 공허 속에서 슬픔과 아픔을 서로 교감하는, 연민과 자비심으로 가득차서 사람이 사람을 서로 구원할 것을 권면하시는 말씀……. 바로 그 길이 사람의 길이요, 사람다운 삶이요, 또한 사람인 증거라면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25년에 주교 250명을 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이끌어냈다. 이 회의에서 예수가 인간이라는 아리우스와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아타나시우스가 피 튀기는 교리 논쟁을 펼쳤다. 그런데 황금으로 치장한 왕관과 옷을 걸친 황제는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주었고,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파문됨과 동시에 그 추종자들도 변방으로 모조히 유배 당했다.

사실 교리 결정권은 처음부터 황제가 틀어쥐고 있었다. 예수가 신이어야만 황제는 위대한 신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었으니, 처음부터 뻔할 뻔자 기울어진 논쟁이었다. 일찍이 예수는 저 밑바닥 사람들의 아들이요 가난한 백성들의 친구였지만, 타락한 교회와 정치 권력자들은 연민도 자비심도 없는 전쟁광에 대물림한 독재자의 올무를 예수에게 덧씌웠다.

우리들의 길동무 예수는 그렇다고 금칠한 성당과 궁정의 로마에 갇혀 잠자코 머물 수 없었다. 하늘 보좌를 이미 버리신 그분이 무슨 욕심으로 그 축축하고 눅눅한 곳에 주저앉아 계실까. 그분은 과거 나자렛을 떠돌듯 위태로운 여행자의 친구가 되어 천지사방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대의 마음 문을 두드리기도 하시고, 불쌍한 이의 친구가 되고, 억울한 자의 변호인이 되어 후미진 골목과 군궁한 산촌을 떠도시는 순례자.

“이제 이 부락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장사치도 장사를 하지 않아. 과거에 도둑질을 일삼던 사내도 훔칠 물건이 없어서 지금은 착하고 반듯한 사람이 되었지. 물건이 없어지자 사람의 욕심마저 사라졌어. 지금은 다들 천국 생각만 한다네. 곰파(절)에서 나눠주는 맛없는 보릿겨가 지겹다고 보리를 먹을 수 있는 마을로 갔던 자들도 두 달만 지나면 보릿겨만 먹고 살아도 여기가 낫다면서 돌아오지. 그런 자들이 돌아올 때 먼 마을에서 사람 취급 못 받은 얼간이나 거지를 데려오기도 하고 이 부락 소문을 듣고 멀리서 정신 나간 자나 천성이 게으른 자들이 찾아와서 눌러 앉기도 해.”

염주를 굴리며 말하는 어떤 노인의 얘기를 여행자 후지와라 신야가 받아 적은 내용은 흥미롭다. 그의 책 <티베트 방랑>을 읽어보면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는 마을, 예수의 참 제자가 방문하는 마을은 바로 이런 곳이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두어야 한다. 주님은 높은 성곽과 궁정과 잘 지어진 교회 건물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시온은 바로 바닥 사람들의 평화가 넘치는 곳,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권력의 저 바깥 주변부. 주먹밥을 나누는 사람들의 미소 속에 시온성은 샛별처럼 오뚝오뚝 빛난다.

야구에서 타자에게 가장 큰 행운은 역시 '텍사스 안타'일 것이다. 빗맞은 공이 야수(野手)들 사이 빈 공간으로 떨어져 안타가 되는 것을 말한다. 1980년대 텍사스 리그에서 그런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텍사스 안타라고 이름 붙인 것. 수비 쪽 입장에서는 서로 공을 미루다가 안타를 내주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잡으려 덤벼들었다간 큰 부상을 입기 십상이다. 야구의 묘미는 이런 예측불허에 있다.

인생살이에도 텍사스 안타가 있다. 내 잘못이나 내 처지 때문에 허방 짚고 헛발 디뎌도 그게 결국엔 축복일 경우가 있다. 주님은 내가 실수 할 때, 내가 한숨 지을 때 못본척 하지 않으신다.

얼굴이 검게 변한 대걸레를 깨끗이 빨아둔 아침엔 세상이 다 맑고 상쾌하더라. 그렇듯 당신의 죄도 맑게 씻기는 날이 분명히 있었다. 이미 당신은 눈물의 세례를 통해 누구보다 맑은 눈동자, 이미 당신은 회개를 통해 누구보다 청정하게 거듭난 영혼이여! 성실하고 착하게 사는 당신은 텍사스 안타 정도가 아니라 좌중간을 뚫는 시원통쾌한 9회말 역전 삼루타다.

이렇게 착한 당신을 억누르고 빼앗고 함부로 해치는 그들이 있다 해도, 그들에게 세상의 구원이란 고작 쓰레기 같은 물질이지만,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슴 뻐근한 평안과 위로가 아니런가!(시편 37)

구원은 모름지기 정의를 세울 때 가능하리라(이사 59, 60장). 정의는 불의가 없는, 부당함이 없는 자리에 피어나는 한송이 들꽃이다. 먹구름과 장맛비와 햇살과 나비떼는 힌 공간에 같이 머물 수 없다. 먹구름, 비구름이 걷혀야만 꽃의 아침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억눌린 이는 역시 여성이 아닐까?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티모 2, 15) 이런 말은 철저히 위작이라는 설도 있지만, 여하튼 초대교회 시대에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일이 구원이 아님을 역설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등장한 이야기임도 잊어서는 안될 듯…….

코린토 첫째 편지 14장은 한술 더 뜬다.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건 당시 열광적인 금욕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쿰쿰한 말이다. 스승 예수로 인해 여자의 권리가 향상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으며, 상습적으로 여자들을 농락했던 못된 이방 종교 사제들의 습성이 교회까지 스며들어 통제불능 상태로까지 치닫자 내려진 초강수 발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라고 해서 다른 사도들처럼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여자(아델펜)를 아내로(귀나이카)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1코린 9,1.5) 그리스어에서 '귀나이카', '귀네'는 성적 상대방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독신 옹호, 독신 고수는 여자를 해방시키는 쪽보다 자기 자신 남자의 해방과 자유에 더 관심을 가진 태도 같다. 2천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교회는 여성 사목자들과 여교우들에게 부당하고 불평등한 미궁이다.

곳곳에 바로 잡아야할 정의가 참 많구나. 몰래 눈물 흘리는 차디찬 손들을 맞잡아 주어야 한다. 구두를 벗고 맨발을 씻으며 이제 고단한 여행을 잠시 쉬어야 할 때. 어서 곁에 앉으라! 친구여. 이 나무 그늘에서 우리는 정의를 노래한 시편을 같이 나누자꾸나.

시를 나누는 순간은 구원과 새로운 창조의 순간. 불어에서 시란 포에지(Poesie)인데 라틴어에서 온 포에시스(Poesis)가 어원이다. ‘만들어 낸다’, 곧 창조의 작업이라는 뜻이다. 시를 나누면 홀로 길을 걷던 외로운 강아지도 곁에 다가와 컹컹, 희망의 새날이 밝았음을 짖어댈 것이다. 살뜰한 교감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그네의 쉼터. 여기 시편에서 어둡고 아득한 생은 서서히 기운을 차리게 될 것이다. 꺼질듯 날아가는 산기슭 반딧불이처럼 어렵게 살아남은, 그대 그리고 나……. 함께 이겨내고 살아남자. 친구여!

멀뚱하니 구경만 하지 않고 그 아픔 속에 뛰어들어 하나가 된 사람들을 볼 때, 정의가 세워지는 하느님 나라를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 사람은 사람 사는 세상, 살맛 나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시편의 급진적이며 변혁적인 시인은 세상을 통째 바꾸려나, 겁이라곤 하나도 없다. 과연 무엇으로?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 권력과 성공담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 하나로! 카타리니 행 기차는 어김없이 여덟시에 떠나가지만, 그대를 기다리고 그대를 영원히 돌보실 분은 한 분 하느님 뿐! 하느님은 그대가 오기까지 오늘도 기차역 차가운 바닥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서러운 분단의 휴전선 맨바닥에서, 촛불 켜진 시청 앞 광장에서, 대공분실 찬바닥에서, 크레인 85호 저 맨바닥에서도 기다리셨던 분…….

별들은 강둑에 낮게 숨어있지만, 언젠가 저 밤하늘을 눈부신 빛으로 가득 메울 것이다. 구럼비가 깨지고 멀리서 항공모함이 미끄러져오고 있지만, 절대 기죽지 말지어다, 친구여. 달랑달랑 모자란 돈으로 살아가는 가엾은 가난도 두렵지 않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정직하고 성실한 세상, 연민 있는 안전망 쳐진 세상을 만들어 낸다면 두려울 것이 과연 무엇이냐.

세상은 순위를 매기려 하지만, 순위가 매겨지는 곳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다. 순위 바깥에 버려진 친구들을 찾아 손을 내미는 분은 우리 주님. “가난한 사람, 아주 잊혀지지 아니하고 억눌린 자의 희망, 영영 헛되지 아니하리라.” 아멘, 또 아멘.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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