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독재자는 왜 노래를 통제하는가

다들 알겠지만 노래에는 강력한 세뇌효과가 있다. 한 번 각인되면 몸이 저절로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된다. 광고시장의 대박 중에는 로고송이 유난히 히트하는 것들이 있다. 상품에 대한 기억은 지워져도 노래는 남는다. 시험공부 할 때 암기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효과 본 경험도 다들 있을 거다.

독재자는 왜 노래를 통제하는가

‘국민학교’ 시절 특활시간에 군가를 1년 넘게 배웠다.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된 후 교육이념까지 ‘정화’와 ‘주인정신’을 강조하실 때였다. 매달 새로 배워야 할 노래들이 지정돼 있었다. 어린 마음에 군가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활기차고 신나는 노래인 것 같았다. 딱딱 떨어지는 가사와 극단적인 스토리텔링도 재미있었다. 아마 내가 남자가 아니고 징집될 예정이 없었기에 그런 막연한 ‘환상’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뇌의 흔적은 강력하다. 군가의 리듬과 가사가 얼마나 세뇌를 위해 특별히 고안되는지 알게 된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그때 배운 군가들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

내가 그저 가사가 멋지고 음이 아름답다고 여긴 수많은 노래들은 우리의 슬픈 역사 속에서 단지 노래로만 존재하지 못했다.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준 노래들은 금지곡으로 묶였다. 부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을 뼛속까지 조종할 정치적 의도로 제조되고 유통된 노래들이 ‘건전가요’로 권장되었다. 모든 음반의 마지막 곡은 이 ‘건전가요’들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야말로 감흥을 깨고 정신을 속박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어떤 노래를 연상하면 그 노래 바로 뒤의 수록곡이던 건전가요 ‘어허야 둥기둥기’가 저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내 기억의 연상작용이 무섭고도 슬프다. 어떤 노래도 권력의 의도를 거스르지 못하게끔 숱한 검열과 심의와 금지의 장벽이 높았던 시절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왜 독재정권은 금지곡들을 양산했을까? 그러면서 왜 ‘건전가요’와 각종 ‘찬가’들을 극성스럽게 양산해 억지로 부르게 했을까?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군가를 가르치며 ‘국가관’을 고취시킨 의도는 너무 뻔했다. 노래의 힘과 가치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입을 모아 부르면 뭔가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그 입심과 집단의 에너지를 잘 아는 권력은 언제나 노래부터 단속했다. 전두환 정권이 했던 강력한 조치들은 박정희 정권이 했던 일을 보고 배워 반복한 것뿐이다. 박정희 정권의 금지곡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했던 감시를 그대로 본 딴 것에다 자의적 해석들이 결합한 것이다.

노래의 날개에 사슬을

우리나라 금지곡의 역사는 길다. 일제강점기부터 검열의 뿌리는 온 국민의 머릿속을 틀어쥐려 했다. 1933년 5월 조선총독부는 '축음기 레코드 취체 규칙'을 만들었다. 아리랑과 봉선화를 금지곡으로 정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입에서 입으로 저절로 체화되다시피 한 아리랑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아리랑이 금지곡이 된 이유는 치안방해였다. 아리랑을 그대로 두면 조선 민중들의 시위나 집회로 이어질 수 있음을 두려워한 것이다.

금지곡의 역사는 노래 자체만의 금지가 아니다. 문화예술계 전체가 얼어붙고 통제 당한 역사이다. 1950년대에는 월북 작가가 가사를 쓰거나 곡을 만든 노래도 모조리 금지됐다. 이는 다른 예술계나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순남의 '자장가' 등은 1990년대 <겨레의 노래> 음반 발매 이후에야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됐다.

▲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과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박정희 정권은 실상 금지와 검열의 문화정책을 폈다. 1960년대 당시 최고의 애창곡이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도 금지곡이 됐다. 왜색이 짙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전 국민이 다 아는 히트곡을 하루아침에 부르지도 듣지도 못하게 만들면서 진짜 만천하에 위세를 떨치는 것은 독재의 힘이다. 그래놓고 박정희 대통령은 동백아가씨를 궁정동 연희에서 애창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 본인은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이 된 것도 몰랐다고 한다. 권력자의 마음까지 미리 헤아린 문공부의 과잉충성의 결과물인가.

1968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에서 시작한 음반심의는 1975년 6월 대통령 긴급조치 9호로 인한 유신체제로 강화된다. 이른바 ‘정화대책’으로 공연예술 심의가 강화되고 흘러간 노래나 최근 노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재심해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 자학, 비관적인 내용, 선정, 퇴폐적인 것들을 골라냈다. 걸리면 이미 나와 있는 음반까지 다 폐기됐다. 당시 재심으로 국내가요 222곡 외국곡 261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금지곡이 곧 미래의 불후의 명곡

금지곡이 된 이유들도 기가 찬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사회 불신조장,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과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됐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도 한때 금지곡이였다. 유신정권 당시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청와대와 공화당의 요청을 거부하고 다른 곡을 만든 괘씸죄였다. 신중현의 ‘미인’은 자꾸만 보고 싶다는 가사가 선정적이라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은 이루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검열관의 정서를 거슬렀기에, ‘아침이슬’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라는 가사 때문이었다. 한대수의 ‘물좀 주소’ 이후 그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이 됐는데 ‘행복의 나라’는 '그렇다면 지금 불행하다는 말이냐'는 게 이유였다.

1970년대 음악시장의 금지곡 사건 중 최고봉은 ‘대마초 사건’으로 당시 최고 인기가수들을 5년 간 활동금지로 묶은 것이다. 연예인들을 고문해서 대마초 혐의를 억지로 씌워 감옥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 일로 대중음악계는 완전히 초토화됐다. 1980년대 금지곡은 영화의 삽입곡까지 포함시켰다. 1981년 제5회 대학가요제에서 광주의 영령들을 위로하는 노래 ‘바윗돌’로 대상을 받은 정오차의 사례는 정권의 폭압을 대변한다. 노래만 금지시킨 게 아니라 정오차라는 전도유망하던 가수의 앞길을 막은 것이기도 했다. ‘독도는 우리 땅’도 1983년 7월부터 11월까지 4개월 동안 금지곡으로 정해졌다. 1982년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 독도 표기 문제에 대한 시정 조치 통보(1983년 6월)와 83년 8월 12차 한·일 정기 각료 회담을 위한 반일 감정의 악화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금지곡은 오늘도 이어진다

금지곡이 곧 가요사의 명곡 목록 같기도 하다. 어쩌면 검열관이야말로 노래에 대한 가장 뛰어난 감식안과 혜안을 갖고 있었던 것인가. 1988년 해금조치 이후 규제가 풀린 금지곡 목록을 보면 지금도 방송에서 자주 나오는 노래들이다. 이런 노래들을 빼고, 과연 방송이 가능했을지 상상이 안 될 정도다. 최근 <나가수2>에서 이장희가 만든 왕년의 금지곡들 ‘불 꺼진 창’과 ‘한 잔의 추억’이 선곡된 것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왜 그 노래들은 다시 불려지는 것일까. 왜 70년대 히트곡 아니 금지곡이 다시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놓는 것일까. 금지곡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심의와 검열은 우리 역사에 너무도 익숙해서 정권의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고는 쉽사리 끊지 못함을 우리는 지난 4년간 체험했다. 지난해에도 여성가족부는 술이 들어간 가사들을 포함해 방송금지가요를 대거 지정했었다. 실제로 몇몇 노래들은 방송에서 금지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착오적이라며 공감하지 못하겠다고 했으나, 권력을 쥔 이들에게는 그만큼 쉽고 가까운 수단인 것이다.

노래 하나가 대중의 귀에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심의’가 있을지 생각해본다. 정치권력은 물론이고 자본과 대형기획사의 권력이 물샐 틈 없이 작용하는 곳이 아닌가. 현재의 가요 시장 판도에서는 배겨날 노래가 흘러간 옛 노래뿐인 것 같기도 하다. 공중파에서 불러도 무탈한 노래는, 이미 검증된 과거 히트곡이다. 새 노래는 설 자리가 없다. 기획되고 관리된 아이돌 체제 또한 도를 넘어 섰다. 창작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심의’에 걸리지 않을 궁리와 함께, 창작욕을 꺾는 자기마음 속의 검열관과 싸워야 한다.

인디밴드들이 모여 부르는 <금지곡 콘서트>가 주말에 열린다. 이 공연이 던지는 함의 때문에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노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노래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가. 끝내 지켜내긴 했으나 상처투성이가 된 노래들, 그 노래들을 6월 하늘로 울려 퍼지게 하는 일은 그래서 여전히 의미 있다.

김원 (문화평론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