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시시한 소슬바람]

거대한 배가 항구에 들어서는데 정말 천천히 움직이더군요.
정말 죽을 만큼 천천히 죽음의 속도로 땅에 다가가더군요.
63빌딩 눕혀 놓은 것보다 거대한 배가
1톤 트럭이 끄는 로프줄 하나로 땅과 만나러 가더군요.
그러나, 끝내 다는 닿지 못하고 몇 센티 남겨둔 채 다시 떠나더군요.
아, 참 통 큰 사랑이다!

저 지극한 침묵의 속도가 정말 큰 사랑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 큰 사랑이 백 년 안에 완성될 리가 있겠는가.
하여, 이번 생에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는 생각이 퍼뜩 스쳐가더군요.

큰 배가 항구에 접안 하듯
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
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온 몸의 힘 다 내려놓고
예인선 따라 가는 거대한 배처럼
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
죽음에 가까운 속도로 온다

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
전속력으로 달려왔으나
그대에 닿기는 이리 힘들구나
서두르지 마라
나도 죽을 만치 숨죽이고 그대에게 가고 있다
서러워하지 마라
이번 생엔 그대에게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김해자,「데드 슬로우」)

 

 

 

 

 

 

 

 

 

 

 

 

 

 

 

 

서두르고 살았습니다.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나에게 쫓겨 죄 짓기라도 한 듯 세상에 떠밀려 살았습니다.
살았지만 살아 내었고 살아졌습니다.
그 형벌로 죽음이라는 물건이 늘 저를 기웃거리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친구를 가까이 두니 생이 이렇듯 찬란합니다.

천천히 숨을 쉬니 하루가 깁니다.
천천히 글을 읽으니 그들의 순간순간 갈피갈피 느껴집니다.
천천히 감자를 먹으니 은빛 포근포근한 전분이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천천히 기린봉을 바라보니 꼭대기에 나뭇잎 흔들리는 것도 보입니다.
천천히 공중을 바라보니 새가 땀방울 떨구며 파닥거리는 게 보입니다.

사람도 자연도 사물도 그냥 천천히 바라보겠습니다.
천천히 만나야겠습니다.
천 년 만 년 시간 저축한 사람처럼,
겁을 넘어 영겁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을
무한한 시공간을 보험 든 사람처럼
햇살에 빛나는 생의 갈피갈피
바로, 이 순간에 붙들어 매고 싶습니다.

도달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룸은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한없이 진심으로 사랑을 향해 가는 것,
다만 한없이 정성껏 사랑의 눈으로 어루만지며 가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유한한 몫입니다.


김해자/시인,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 로 등단.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와 <축제>가 있다,
현재, 대안학교에서 아이들과 노는 한편,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 일도 조금 하고 있다
.

/김해자 2008.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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