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김미경]

엄마가 예뻐집니다. 딸인 제가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변 이들이 엄마에게 하는 소리입니다. 성당교우이시며 엄마를 어린 동생 같이 귀여워하신다는 80대 할머님은 최근에 이런 말씀을 하셔서 주변 할머님들이 막 웃었다고 합니다.
“야... 요셉피나야, 너 요새 왜 이렇게 대책 없이 예뻐지냐?”

▲ 엄마의 결혼 전 사진

엄마는 원래 예뻤습니다. 처녀시절, 엄마는 주변에서 따라올 미모가 없을 정도로 예뻤다고 합니다. 엄마의 미모에 엄청 자부심을 갖고 계신 외삼촌은 종종 이리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너희 중 누구도 엄마 미모를 따라 오지 못한다. 너희 엄마가 나섰다 하면 온 동네가 훤했다.”

이렇게 예뻤던 엄마는 그만 그 꽃다운 처녀시절을 누리지도 못하고 결혼을 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와의 말 못할 사정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딸을 주기로 약조하셨던 겁니다. 모란 꽃 같이 활짝 피었던 엄마는 열 살 이상 많은, 엄마 표현으로 '삐쩍 마르고 얼굴색이 까만 아저씨'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시집간 뒤에 엄마가 아버지와 선을 보고 거의 강제나 마찬가지로 결혼한 내막을 알게 되었을 때,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그 때 도망가지 않았어?”

엄마는 “도망가려고 했지.”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보따리를 싸놓고는 외할아버지 입장을 생각해서 밤새 울다가 그냥 참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실제 도망을 시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 외할아버지께서 바로 잡으러 오셨답니다. 그때부터는 감시가 심해서 도망도 못가고, 할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결혼하게 된 엄마가 하도 불쌍해서..“그래도.. 어떻게 해서라도 결혼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살았어.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기 어려웠지.”

그 때, 엄마가 도망에 성공을 했다면 저는 없었겠지만 엄마의 인생을 쭉 돌아본다면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결혼 이후 엄마는 한 번도 엄마 자신을 위해 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아버지는 마당에 빗질 한번 하지 않은 분이였던 것 같습니다. 신혼 초기에 엄마는 눈이 와서 마당의 눈을 쓸어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하셨답니다. 할머님은 아들이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시고는 그냥 팽~ 돌아앉으셔서 식사도 드시지 않으셨답니다. 아마 귀한 독자 아들에게 그런 일을 한 번도 시키지 않았나 봅니다. 그 이후 엄마는 그런 부탁도 할 수 없었겠지요.

그 당시의 남자들 대부분이 ‘침묵은 금이다’라는 굳센 교육으로 애정표현은 물론이고 아내와의 대화도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내를 돕는 일도 아주 드문 일이였을 겁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런 전형적인 아버지셨습니다. 저도 아버지와 자잘한 대화를 나눈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엄마는 아버지와 소소한 정조차 나누지 못하고 사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엄마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야.. 무뚝뚝하던 네 아버지가 먼저 갈라고 그랬나? 돌아가시기 1-2년 전부터 많이 변했었어. 다정하게 말도 하고.. 엄마 위해주려고도 하고..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던데..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앞으로의 세상은 남자나 여자나 공평하게 사는 세상이 될 거라고 하시면서 세 딸들에게도 차례나 제사에 참여하게 하실 정도로 남녀 구분 없이 공평하게 대해주셨고 당당하게 크라고 격려해주셨던 아버지께서는 이상하게 엄마에게만큼은 예전 그대로의 보수적인 시각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엄마가 뭐라고 말씀하시면 귀담아 듣지 않으셨고 줄곧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나이 차가 많이 나기도 했고 인생경험이 없는 엄마라 ‘어리다’는 생각에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아버지의 그런 태도가 싫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엄마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듯 변하시다가 갑자기 먼저 가버리셨으니..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웠을까요?

아버지의 죽음은 엄마에게는 아쉬움에 앞서 막막함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결혼해서 바로 2년 터울로 아이 넷을 낳고 기르면서 할머님께서 지병으로 오랫동안 입·퇴원을 반복하셨기 때문에 엄마는 잠시도 쉴 날이 없이 가사에 파묻혀 그렇게 사셨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는 병원비에 가정경제가 많이 기울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사회경험도 없이 남편에게 의지해서 살다가 꼬물꼬물 우리 4남매를 홀로 키우셔야 했으니 감당하기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얼마나 앞이 캄캄했을까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가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워졌는데 저도 참.. 철이 없었지요. 대학을 간다고 설쳐댔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에게 돈 벌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엄마 복이 많은 거지요. 이런 엄마 덕에 우리 4남매는 모두 대학을 마칠 수 있었지만 엄마로서는 여유 한번 갖지 못하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사셨을 겁니다. 우리들 다 크고 시집 장가 가고 이제 손주 보며 좀 여유가 생길만 하니까.. 그만 당뇨가 와서 고생하시고.. 허리 다쳐 고생하시고.. 다리 다쳐 고생하시고.. 그 발랄하시던 엄마가 지팡이에 의지해 느릿느릿.. 마치 인생의 낙이 없는 분처럼 힘없이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렇게 의욕을 잃은 엄마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기 시작한 것은 바로 노인복지관입니다.

엄마가 노인복지관에 다니신 지는 한 8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엔 노래교실만 슬슬 다니시더니 일어, 영어, 요가까지 그 영역을 넓히시더니 지금은 사진수업까지 확장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말과 성당노인대학을 다니는 수요일을 빼곤 거의 매일 복지관에 다니시면서 뭔가를 배우십니다. 배우는 것이 참 좋다고 하시며 신이 나서 다니십니다. 몇 년 전부터는 친구들도 많이 사귀시고 선생님들과도 친하셔서 사회적 관계가 분주해지셨습니다. 요새 식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을라하면 먼저 엄마 스케줄부터 확인해야할 정도입니다. 얼마 전에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야.. 나 늦복이 있나봐. 요새 참 재미있어. 복지관에서도 내가 아주 인기 만점이다?”

이렇게 신나는 복지관 활동을 하시는 엄마에게 또 다른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활동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길거리 활동입니다. 처음에 용산참사미사로 시작해서 4대강 반대 미사, 여의도 시국 미사, FTA 반대 미사, 얼마 전에는 언론파업 지지현장까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을 따라 누비고 계십니다.

▲ 언론파업지지현장에서.. 동지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반가워하신 두 분..

그리고 최근에는 문정현신부님 광주인권대상 수상식에도 다녀오셨습니다. 제가 일 때문에 동행을 못했는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에서 마련한 단체버스를 타고 동지 어르신과 함께 척척 다녀오셨습니다. 몸이 불편하셔서 걱정을 했는데 동지 어르신과 함께 힘들지 않게, 심심하지 않게 잘 다녀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또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엄마가 시상식에 참석하셔서 찍어 오신 사진입니다.
사진반에 들어가시더니.. 저보다 더 잘 찍으십니다. 허허헉 ^^*

▲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엄마는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하는 용산참사생명평화미사에도 가능한 참여하시고 싶어하십니다. 또 오늘 6월 4일에는 재능교육 해고노동자 전원복직을 위한 미사에도 참여하실 예정이십니다.

제 생각에 엄마는 다른 할머님에 비해 사회적 참여 욕구가 강한 분 같습니다. 내가 “엄마 이러다 투사할머니 되는 것 아냐?” 했더니 엄마는 “내가 원래 민주투사야. 4.19 때 내가 서울대 학생들에게 돌도 막 날라다 주고 그러지 않았냐?” 하셨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옳고 그름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갖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현장에 참여하신 날에는 몸은 피곤해도.. 정말 하루를 잘 보냈다고.. 보람된 하루였다고.. 뿌듯해 하십니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시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해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더 예뻐지고 생기발랄해지겠지요.

얼마 전에 엄마는 치매 검사를 받으셨습니다. 간호사가 도중에 “아주 똑똑하시네요.”라고 말했다며 이러십니다. “야.. 옛날에 네 아버지가 나보고 ‘독일제 머리’라고 하지 않았냐? 뭐든지 척척 기억한다고 말이야. 주민번호 등등 외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

이렇게 마음도 생각도 건강하고 똑똑한 울 엄마!!! 그 모습 변치 말았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더불어 몸도 같이 건강해지셔서 펄펄 날아다니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욕심도 내어 봅니다.

젊은 시절, 나를 버리고 부모님에게, 남편에게, 자식에게 헌신하기만 했던 삶을 사신 울 엄마. 비록 70대 넘어 늦게 찾아 왔지만.. 너무 늦게 온 그 모습이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사시는 그 모습이 제 눈에는 참 아름다워 보이고 행복해 보입니다. 엄마가 그렇게 신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기도하면서... 엄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백만 번 파이팅!!! 입니다.

김미경 (베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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