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3]

▲ ⓒ 정청라

농기계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합천에 살 때는 사람이 서서 쟁기질하듯 밀고 가며 모를 심는 이앙기만 보고 살았는데, 여기 오니 이앙기도 트랙터만 해서 흡사 전투기처럼 보인다. 그러니 몇 십, 몇 백 마지기 모내기, 그까짓 게 뭐 일이겠는가? 옆에서 재깍재깍 모판 가져다 주는 사람만 있으면 하루 열 마지기 심는 것도 우습다고 한다.

문제는 기계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사람도 속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신랑이 품앗이로 이웃 아저씨네 모내기를 도왔는데, 그 모습을 곁에서 보기가 안쓰러웠다. 모판을 여섯 개씩 지게에 지고 가파른 다랑이 논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씩 왔다갔다하지 뭔가. 우리 마을 논은 거의 대부분 길 없는 다랑논이라, 냇가를 건너 산비탈을 올라 모판을 옮겨야 할 때도 있었다.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말이다.

신랑은 그렇게 이틀 동안이나 모판을 져 날랐다. 그 대가로 이웃 아저씨는 우리 논 두 마지기(5백 평)를 한 시간도 안 걸려 뚝딱 갈아 주었는데, 나는 뭔가 큰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기계와 사람의 품앗이는 그 시작부터 공정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다. 기계가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어찌 그 생산성 하나만으로 측정해 교환한다는 말인가! 이 일로 기계 부리는 사람과는 아예 품앗이 자체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 "논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도 놀고, 개구리랑 올챙이도 놀고" ⓒ 정청라

그 확신 덕분에 올해도 망설임 없이 손모내기를 하게 되었다. 합천에 있을 때도 손모내기를 했지만, 그때는 논이 작았다. 2백 평 조금 넘는 정도니 신랑과 내가 번갈아가며 쉬엄쉬엄 심어도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논이 두 배 이상 커지니 적잖이 고민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둘이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면야 큰일이 아니겠지만, 한 사람은 어린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니 5백 평 두 다랑이가 버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모내기 쉽게 하자고 신랑을 노예로 만들 수는 없었다. 신랑은 모내기하는 날 새벽 다섯 시부터 일어나 논에 나갔다. 나는 아이 아침밥 먹이고 아홉 시 조금 넘어서 새참과 물을 챙겨 들고 논으로 갔다. 그 간의 손모내기 경험이 손에 익어서인지 생각보다 진도가 많이 나가 있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논둑에 앉아 한참을 놀아주다가, 아이가 개구리 관찰에 빠져 있는 사이 맨발로 논에 들어갔다. 미끄덩거리는 논흙이 발에 착 감기는데, 그 순간 내 몸이 내가 모내기를 참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맞다. 난 논에 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처음에는 논물에 들어가는 게 찝찝하고 약간 불쾌하게 느껴지는데, 막상 논물에 발을 담그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모를 물속에 살짝만 꽂으면 땅이 저절로 모를 쑥 끌어당기는 것 같아 그 재미도 좋다.

“엄마, 나도 들어갈래.”

내가 모를 심고 있으니 아이도 논에 들어가겠다고 보챈다. 논둑에 나와 있던 신랑이 아이 바지와 신발을 벗겨 아이를 논에 넣어 주었다. 물론 모가 아직 안 심어진 논이다. 아이는 논둑에 올라갔다, 다시 논에 들어갔다 반복하며 그것만으로도 재미있어 한참이나 논다. 모를 심는 나도 놀고, 논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놀고, 개구리랑 올챙이도 놀고, 거머리랑 물방개도 놀고, 그렇게 모두 논에서 논다.

이앙기로 모를 심었다면 이렇게 잘 놀 수 있었을까? ‘모내기’라고 하는 낱말과 시간 안에 우리만의 이야기와 추억을 담을 수 있었을까? 기계로 농사짓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기쁨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모내기를 좋아할 수 있다.

▲ 모내기에 열중하고 있는 신랑 ⓒ 정청라

▲ 논둑과 논을 오가며 노는 아이 ⓒ 정청라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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