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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교회 밖에서 변방의 사형수 예수를 만난다[가톨릭도서관 나들이] <혁명을 기도하라>, 한승훈, 문주, 2012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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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30  17: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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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독교 밖에서 예수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한다. 억눌린 자들과 술을 퍼마시고, 교회를 점거하고 성직자를 비판하며,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았던 혁명의 예언자, 예수”

삼십대의 젊은 종교학도 한승훈이 지은 <혁명을 기도하라>(문주, 2012)는 교회 밖에서 그가 만난 ‘변방의 사형수. 예수’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성서 안에서 발견한 예수는 ‘하느님의 거룩한 독생자’도 아니었고,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와도 전혀 다른 존재였다. 차라리 ‘반란과 전복의 붉은 예언자’였으며, 버려진 자들과 광야를 떠돌며 세상의 모든 권력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였다. 예수는 질서와 안녕을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맨발로 대지를 딛고 모든 체제와 권위를 뒤엎는 혁명을 기도하는 불온한 예언자였다.

제국에 맞서는 불온한 탄생

   
예수는 탄생 자체가 불온했다. 로마제국의 시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프로파간다(선전)를 패러디한 레지스탕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폴론 신전에 예배드리러 갔던 어머니가 뱀의 정기를 받고, 아버지가 아내의 자궁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꿈을 꾸고 태어났다는 아우구스투스처럼 예수는 ‘남자를 모른 채’ 동정녀에게서 잉태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이 ‘로마의 평화’를 가져온 ‘복음’이라고 말해지는 순간에, 마르코 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제국의 황제에게 바쳐진 용비어천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유대아의 변방 갈릴래아 출신 목수의 아들이며 사형수로 죽은 예수에게 봉헌되었다. 한승훈은 이를 두고 “저항문화는 지배문화의 개념을 훔쳐 패러디를 통해 저항한다”고 전한다.

“예수의 탄생이 기쁜 소식이라는 주장은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이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폭로한다. 예수가 옛날부터 예언된 유대의 왕이라는 이야기는 헤로데는 왕이 아니라고 고발한다. 예수가 처녀에게서 태어난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외치는 저항세력의 외침이었다.”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아예 “그분은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다”고 전한다.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권력에 맞서는 예언자

예수가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야훼 하느님은 떠돌이와 노예들이나 믿던 하느님이었다. <탈출기>에서 보듯이, 이 하느님은 단순한 ‘노예의 신’이 아니라 ‘노예를 해방시키시는 신’이다. 그분은 히브리인들이 가장 고통받고 억압받던 순간에 나타나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분이다. 또한 중근동의 신들이 화려한 신전 속에 모셔시고, 1세기 유다인들이 엄청난 규모의 예루살렘 성전에 야훼를 모시며, 제왕과 사제들이 결탁하고 있을 때, 예수는 소박한 장식의 이동식 천막을 통해 당신 백성들처럼 떠돌던 야훼 하느님에 대한 예언자들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아울러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체제와 맞서 싸우던” 세례자 요한이 죽음을 향해 달리던 예언자였던 것처럼, 예수 역시 “제왕이 아닌 하느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언자 반열에 서 있다. 예수는 이른바 ‘죄인’으로 분류되던 이들과 더불어 식탁에 앉음으로써 하늘나라가 이미 이 땅에 실제로 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 마당에 기존의 가족이나 사회적 구별은 소멸된다. 사람을 가르는 유일한 구분은 “그 세계가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뿐”이다. 그래서 ‘회개’한 이들,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다.

교리를 성경처럼 믿어서야..

여기서는 ‘믿음’도 새로운 뜻을 얻는다. 치유이야기에서 예수는 줄곧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특정한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이 아니다. 상식과 통념을 뛰어넘어 아무 근거도 없고 보증이 없어도 밀고 나가는 용기다. 예수는 아주 작은 믿음만 있으면 산을 들어다 옮길 수 있고,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한승훈은 “이것은 대단한 허풍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들러엎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예수와 초기교회의 바울은 더 적극적인 믿음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모든 권력을 초월하는 진실에 대한 믿음, 자신의 신념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길을 함께 하는 동료에 대한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믿음’은 소극적이며, ‘지켜야 할 것’에 불안하게 매달린다. 신자들은 세계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면 설레어 호기심을 느끼기 보다는 그것이 자신들을 시험에 들게 해서 믿음을 무너트릴까 봐 염려한다. 그 결과는 정치적 보수성보다 더 심각한 ‘삶에 대한 무감각’이다. 그들은 불의한 현실이 눈앞에 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도 “이들을 돕는 일이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지, 성경적인지 아닌지” 따지며 망설이고만 있다. 나아가 굳어버린 교리를 성경적이라고 믿어버린다.

거라사 지역의 ‘레기온’처럼 악령들린 사람 이야기를 보면, 예수의 반 로마적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레기온은 로마군단을 뜻하며, 이 야만적인 악령들이 자청해서 찾아들어갔던 돼지들은 로마군의 식량이었다. 따라서 모세가 홍해에서 이집트 군대를 수장시켰듯이, 예수가 이들을 갈릴래아 호수에 쳐넣었다는 이야기는 식민지 유대인들에게 통쾌한 이야깃거리였을 것이다.

예수는 종교적 ‘브로커’ 아닌 친구를 부른다

한편 예수는 ‘급진적 방랑자’였다. 예수는 한없이 떠돌아다니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혼자 독점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람들에게 교리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요청했다. 예수는 자신을 ‘교주’로 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사제나 목회자로 삼는 ‘교회’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에서 보듯이, 제도 안에 머물지 않고 거듭 새삼 방랑길에 나선다. 예수는 ‘거룩한 위계질서’ 안에서 구전을 받고 하느님에게 끈을 대주는 ‘브로커’가 되기를 거부한다.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 역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친구’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평등에 대한 놀라운 정식을 얻게 된다. “예수는 하느님과 같은데, 우리는 예수와 같다”는 말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예수 사후에 제자들은 복음서를 손질해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덧붙임으로써, 베드로를 ‘최초의 교황’으로 만들었다고 한승훈은 비판한다. 불과 몇 세기가 지나지 않아, 신자들의 후견인(파트로네스)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이 파테르(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인 그리스도교는 한때 적이자 풍자의 대상이었던 황제를 ‘후견인’으로 모시고 제국의 지배에 협력하게 된다.

한승훈은 이러한 위계질서를 혁파하겠다고 훗날 나섰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이제는 골목마다 교황이 생기게 되었다”고 개신교 역시 비판했다. “실상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같은 것은 예수의 사고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가 파괴하고자 했던 피라미드형 위계체제의 일부였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히브리의 신인 야훼가 어떤 매개자나 대리인도 세우지 않고 직접 통치하는 나라다.

예수를 기억하는 당신이, 부활한 예수의 몸이다

예수는 체제에 의해 배제된 소수자와 버림받은 자들의 혁명, 겨자씨들이 거대한 나무가 되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체제에 저항하고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 전통은 제도종교 안에도 지금껏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다만 제도 안에서 길들여지며 교회법으로 결박되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승훈은 예언자 전통 안에서 부활을 통해 “인간은 각자 스스로에게 왕(메시아)이고, 서로에게 구원자(메시아)”가 된다고 말한다. 세례자 요한은 바른 소리하다 죽은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온 사람이었고, 예수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예언자 전통에서 ‘부활’이란 압제자에 의해 죽은 예언자의 일을 이어서 계속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나는 종교권력의 지배와 신격화를 거부한 예수가 ‘영광된 모습으로 승천’해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실’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겠다. 대신 그는 새로운 몸으로 부활해서 그가 싸워야 할 현장으로 가고 있다. 그 몸이 어디 있냐면, 바로 그를 기억하는 당신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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