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왜 운명적 사랑은 신의 영역인가?

이적요의 사랑은 회춘 아닌 재생

은교는 이적요의 삶에 홀연히 찾아든다. 바람처럼 꿈결처럼. 기다린 것도 기대한 것도 아닌데 얼결에 틈을 내주고 말았고, 이윽고 이적요의 삶 전부를 뒤흔든다. 고목같던 이적요의 평온은 소생을 넘어 재생의 에너지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르네상스(Renaissance, 재생)의 의미를 이처럼 육화시켜 온전히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우리 문학에도 르네상스가 온다면 그 첫머리엔 이제 단테의 베아트리체나 괴테의 그레첸 대신 은교가 놓일 것인가.

이적요는 르네상스를 직접 살았다. 재생은 황홀한 아름다움이지만 대가를 요구한다. 살이 뚫리고 뼈가 우그러지는 고통을 감내하는 자만이 껍데기를 벗고 새 살 돋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신음조차 낼 수 없는 재생의 과정을 이적요는 받아들였다. 그 생의 환희가 하도 벅차서, 그는 모든 것을 감수할 각오까지 했었다. 소설 <은교>를 자신의 원고로 발표할 계획이었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원고의 ‘이름’을 빼앗긴 이후 그토록 삶이 폐허가 됐을 리 없다.

영화 속 은교(김고은 분)는 평범한 여자도 어린 소녀도 아니다. 인간성을 꿰뚫었거나 혹은 인간의 바닥을 시험하는 자다. 어쩌면 관세음보살이거나 작가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뮤즈의 현신일 수 있다. 이적요(박해일 분)는 은교라는 여성성의 완성체처럼 보이는 형상에 감화되었고, 그래서 일생을 건 도전에 응한다. 서재를 나와 남성이 되고픈 열망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한다는 것은 시인 이적요에게 분명 두려움이었다. 찬사도 비난도 추락도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안전판 없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벼랑 끝에 대롱대롱 걸린 은교의 손거울을 망설임 없이 주워왔을 때, 이미 이적요의 청춘은 돋아났다. 재생은 치열하게 새 세포를 밀어 올리는 중이었다.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소설 <은교> 초고의 모든 쪽에 찍힌 ‘이적요’라는 낙관을 영화는 깊이 응시한다. 그것은 은교가 공들여 해준 가슴의 헤나와도 같은 일종의 낙인이다. 지울 수 없는 곳에 원고를 쓴 이적요의 ‘변심’을 알아챈 서지우(김무열 분)가 스승에게 말 한 마디 없이 원고를 도둑질한 이유다.

소설가로서 육체를 가진 자로서 이적요는 ‘다시’ 살고자 했다. 평가가 두려워 소설을 제자 이름으로 내는 ‘늙은’ 시간은 갔다. 그렇게 되면 서지우는, 얼마든지 다른 제자나 심지어 기계로 대체 가능한 ‘자기 목소리 없는 자’에 불과한 서지우의 삶은 새 국면에 놓인다. 어떻게든 자기 목소리를 만들든가 문학을 떠나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 스승과 소녀를 지켜보는 ‘사회 제도적 시선’에 불과한 변별력 없는 눈을 가진 그에게는 파국이다. 서지우는 <은교> 초고를 보는 순간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왜 젊은 박해일을 택했을까?

이적요는 칠순인데 젊은 배우 박해일이 특수분장을 하고 노인 연기를 했다. 박범신의 원작소설 <은교>와 정지우의 영화 <은교>의 주제의식은 여기서 완전히 갈린다. 단지 ‘조금’ 젊어지는 것에 영화는 관심이 없다.

박범신의 지적이 옳다. 관객은 분장한 흰 머리칼이나 주름살이 정교할수록, 박해일의 연기가 자연스러울수록 그의 탄탄한 젊은 근육을 옷 너머로 연상한다. 완전히 새로운 생(生), 껍데기를 벗을 용기란 그런 역설 속에서 탄생하는 것인가.

박해일은 젊다 못해 푸르다. 실제 나이가 젊기도 하지만 그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뜻이다. 영화 속 까까머리의 그는 심지어 은교 역의 김고은과 동년배로 보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영원한 소년’의 이미지를 오래 전부터 구축한 이 배우만이, 그래서 감독의 야심을 실현해 줄 수 있었다. 박해일은 낯익은 배우면서도 제자로 등장하는 (우리가 잘 몰랐던) 낯선 배우 김무열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인다.

갑옷과도 같은 특수분장을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스크린 너머 실제 박해일의 젊은 얼굴을 내내 보고 있는 아이러니. 그랬다. 박해일로 주인공이 결정되는 순간 영화 <은교>는 늙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시 <동백꽃>과 소설 <은교>의 차이

은교는 ‘씨앗’같은 싱그러운 영혼이다. 창조의 싹이 자라나는 과정에 관심이 많다. 왜 어떤 것은 ‘별’과 같은 찬란한 창조물이 되고 어떤 것은 그냥 버려지는지 궁금해 한다. 무엇 하나 그냥 넘기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고 되묻는다.

은교의 싱그러움의 핵은 그 왕성한 호기심에 있다. 은교는 처음부터 이적요의 자취와 흔적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즐겨앉는 안락의자, 그의 책상과 연필, 그의 이불과 가슴팍, 그리고 마침내는 그의 정신의 거처이자 산실(産室)인 간이침대까지.

은교는 대 시인 이적요의 대표작 <동백꽃>을 외우는 소녀였다. 교과서에서 배웠거나 시험에 나왔다고 해서 시가 외워지는 것은 아니다. 은교는 이적요의 영혼의 어떤 부분에 공감했고, 그 위대함에 어떤 식으로든 공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을 그토록 예쁘게 묘사한 소설 <은교>의 지은이가 누구인지가, 그래서 은교에게는 몹시 중요하다. <동백꽃>의 위대함은 은교가 태어나기도 전에 완성된 은교와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1년 간의 한국 단편 중 가장 뛰어났을 <은교>의 위대함은, 오로지 은교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함의 순간에 동참한 기쁨, 일개 소녀에 불과한 자신이 ‘별’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된 엄청난 사건이다.

은교는 누가 썼는지를 집요하게 관찰한다. ‘붉은 부리’와 ‘영원한 처녀’의 차이는 “이승과 저승만큼이나” 다르다. 시인이 썼다면 더더욱 놀라운 사건 아닌가. 서지우에게 “할아버지와 선생님은 비밀도 없어요?”라고 묻는 은교는 분노에 차 있다. 두 남자가 그런 농밀한 것까지 나누고 있다면, 은교는 두 남자의 대화 속에서 가공되고 재단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하다.

자신이 온전한 실체였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작가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 은교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은 데는 서지우가 작가답기는커녕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했다는 점도 작용한다. 서지우는 세상의 편견과 이중 잣대 따위를 대변하기에 여러 목소리가 혼재된 화법을 구사한다.

그러다 스승과 제자의 암묵적 ‘승인’으로 인해, 서지우가 썼다는 쪽으로 생각을 굳힐 수밖에 없게 된다. 누가 봐도 그럴 상황이었다. 서지우는 장차 써야할(청탁이 밀려올) 원고의 가능성을 자랑하는 동시에, 스승과 대놓고 ‘계약’을 맺고 싶어 했다. 그가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것을 관객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스승은 그와의 모든 관계는 끝났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필생의 작품 <은교>의 친필원고를 태우면서, 이적요는 속으로 서지우를 인간적으로는 용서했으되 관계는 완전히 끊어낸 것으로 보인다.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라는 의미는 어쩌면 작별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은교만이 이 순간 저울질을 끝낸다. 이미 쓸 것을 다 써서 더 이상 쓸 것이 없는 ‘뭉툭한 연필’의 소유자와, 앞으로 써야할 글이 물밀듯이 차고 넘칠 신진 작가. 은교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날 밤의 선택이 향후 또 어떤 새 작품으로 잉태될지를 기다리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뻔한 말만 하는 서지우가 처음으로 속내를 뱉은 “외로워서 그런다”는 말을 흉내내 “여고생도 외로워서 그래요”라는 억지춘향으로 자신의 행동에 의미부여하는 것도 그래서다. 이적요의 말을 따라하던 은교가 서지우의 말을 흉내낸 것은 의심을 거두며 <은교>의 작가로 인정한 셈이다. 착오였을지라도.

사랑이 영혼을 건드리는 순간

시간이 흘러 언어란 “그 때 그 순간의 공기… 온도… 습도… 거기 있지 않고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들까지 내포한 것임을 깨닫고서야, 은교는 지은이가 누구였는지 알게 된다. 찍혀 넘어진 장작 같은 이적요의 눈물 한 줄기는 그래서 참으로 뜨겁다.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이 운명적 사랑에 포획되었던 자, 결국 언어에 바쳐진 몸이었던 이적요는 스스로의 눈물에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 영화는 ‘늙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왜 한 공간에서 이적요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고, 서지우는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는가. 남자의 사랑은 일생을 건 것이라는, 눈앞의 대상을 만나기 이전부터 삶 속에서 자라난 이미지이며, 그런 것이어야만 생의 진전이 온다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위대한 사랑이 위대한 창조로 연결되는 비밀의 과정에 대한 채록이다. 그런 사랑에 ‘닿은’ 사람은 그게 비록 한 순간일지라도 결코 잊지 못할지니, 그 원형을 복원하려는 갈망이야말로 창작의 힘이 아닐까.

김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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