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드디어 회담이 이루어졌다. 박 씨의 아들이 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가 한 식구가 되는데 찬성합니다. 이제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열다섯 평 다세대 주택에서 함께 살기로 합니다. 두 분이 사시는 동안 이 집은 어머니 앞으로 양도해 드리고, 두 분 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각각 아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이렇게 박 씨와 윤 여사는 자식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한 지붕 아래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7년 동안 아내 병수발하며 웃음 잃은 박 씨 … 탈북 와중에 가족 잃은 윤 여사

박 씨의 나이 예순다섯. 마음 고생, 돈 고생, 아내 걱정으로 웃음을 잃었다. 7년 전 아내가 뇌종양 수술을 받은 후 뇌경색이 찾아왔다. 아내는 7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해가 갈수록 박 씨 혼자 아내를 돌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박 씨 역시 고혈압과 당뇨의 합병증으로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결국 아들과 상의해서 아내를 이곳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박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으로 출근한다. 아내는 6개월 전부터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아내에 대한 그의 지극한 정성은 병원 사람들이 다 안다. 주위에서는 간병인이라도 쓰라고 권하지만, 박 씨로서는 꿈도 못꾼다. 그의 전재산인 15평짜리 다세대 주택은 아내의 뇌종양 수술비 대느라 월세로 내놓고 매월 받는 연금 오십만 원이 아내의 입원비와 박 씨의 생활비다. 요즘 박 씨는 병원 가까운 지하 월셋방에서 혼자 지낸다.

작년 겨울, 그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다 캄캄한 빙판길 위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리 인대가 끊어지고 요추에 금이 갔다. 두 달을 꼼짝없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처지인데 아내가 문제였다.

‘똥은 돈이다.‘ 윤 여사의 인생철학이다. 그는 이 병원의 간병인으로 일한다. 9년 전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다. 그동안 북한에 남은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3년 전 간병 일을 시작하던 첫 날 노인 환자의 똥을 치우며 다짐했다. 똥을 금덩어리 보듯 하리라.

그러는 사이 중국의 브로커를 통해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큰아들마저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다 공안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압송된 후 수용소에서 소식이 끊겼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온 것을 후회했다. 다행히 어느 목사의 주선으로 2년 전에 작은 아들이 한국으로 오는데 성공했다. 비록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윤 여사는 작은 아들 장가까지 보냈다.

두 사람의 '새로운 인생'

박 씨와 윤 여사의 운명적 만남은 어쩌면 박 씨 아내 덕분일지도 모른다. 박 씨가 입원한 후 중환자실에 누운 그의 아내를 돌볼 사람이 없었다. 그때 간병인 윤 여사가 나섰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박 씨의 아내를 간병하는 윤 여사를 두고 동료 간병인들은 ‘꼼수가 있다’, ‘박 씨와 바람이 났다’고 수군거렸다.

윤 여사는 억울했다. 아내를 돌보는 박 씨의 형편이 딱해서 도와줄 뿐인데, 순수한 마음을 오해하니 원통하고 답답했다.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축 처진 박 씨의 초라한 어깨가 눈에 선했다. 간병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윤 여사는 박 씨의 고통을 안다.

박 씨가 퇴원하기 전에 아내는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뒀다. 심장마비였다.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박 씨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평소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은 누추하게 변했다. 어느날 불쑥 윤 여사가 박 씨의 월세방을 찾아왔다. 병원에 남아있는 아내의 유품이라며 보퉁이를 내밀었다. 윤 여사는 박 씨의 쓸쓸하고 차가운 방에 온기를 주었다.

박 씨는 요즘 새로운 인생을 산다. 하늘도 파랗고, 인생도 파랗고, 마음도 청춘같다. 그저 하루하루가 감사한 얼굴이다. 일자리도 얻었다. 아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주차관리인으로 취직한 것이다. 아침마다 경비실에서 인사를 건네는 박 씨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박 씨는 윤 여사도, 직장도 모두 아내가 준 선물이라고 믿는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 만난 두 분의 인연이기에 축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고 한다. 사랑도 다 같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랑이 아닌 것은 고통을 결코 품지 못한다. 사랑의 바로미터는 고통에 대한 태도다. 그러하기에 아내를 위해, 가족을 위해 고통을 견디고, 그들에게 주어진 짐을 감당한 박 씨와 윤 여사, 두 분의 새로운 시작에 행복을 빈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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