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생태영성에 대한 교회의 관심 늘어날까?

독일 빙엔의 힐데가르트(1098~1179)가 거의 1천년 만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바티칸 로마 교황청은 지난 5월 10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힐데가르트를 시성했다고 밝혔다.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모든 서방 그리스도교 전통의 가장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지만, 그동안 독일교회에서만 그녀를 성인으로 기념해 왔다. 힐데가르트는 독일 신비주의자로도 유명하지만, 전례음악과 희곡, 약학과 의학, 그리고 미술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힐데가르트 성녀는 특히 여성에 대한 글에서 대단히 개혁적이었고, 종교생활 또한 순종적이라기보다 예언자적 역할에 대한 깊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온 생애에서 교회당국과 수없이 마찰을 일으켰는데, 적어도 두 번은 신념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불복종했다.

▲ 빙엔의 힐데가르트

1098년 라인란트의 귀족가문에서 열 번째 자녀로 태어난 힐데가르트는 십일조 봉헌물로 여덟살 때 스판하임의 은수자 유타에게 보내졌다. 유타는 성 디시보데 산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여기서 힐데가르트는 15살에 이미 수도자로 살 것을 서약했다. 당시 유타 주변에는 그를 존경하던 이들이 몰려들어 대수도원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1136년 유타가 이승을 떠나자 38살이던 힐데가르트가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힐데가르트는 환시와 질병으로 고통받았는데, 믿을만한 친구였던 볼마르 수사가 그 환시를 기록하라고 설득해 마침내 <길을 알라>(Scivias)라는 책을 썼다. 이 책 서문에는 자신의 지혜가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비추심으로 얻은 것임을 강조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강생하신 지 1141년, 그리고 내가 마흔두 살하고도 7개월이 되던 해에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하늘이 열리고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빛이 열린 하늘에서 내려와 내 머리로 쏟아졌으며, 내 마음과 가슴에 불을 지폈다. ... 갑자기 나는 시편과 복음서, 신구약의 다른 가톨릭 서적에 대한 설명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여성과 그리스도교 2>, 바오로딸, 재인용)

힐데가르트는 자시느이 환시가 “꿈에서나 잠잘 때나 열광적으로 흥분한 상태나 육안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진한 마음으로 영적인 눈과 귀를 통해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이러한 환시에 대해 힐데가르트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에게 자문을 청했으며 베르나르도는 교회 가르침보다 ‘내적 지시와 종교적 열정’이 우선이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다. 결국 마인츠의 대주교와 교황 에우제니오가 힐데가르트를 승인했다.

당시에는 여성이 하늘의 인도하심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더욱이 여성이 가르칠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이 약한 자들을 택하시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복음말씀을 해석하면서 “시대가 나약해져서 남성들이 마땅히 자기 몫이어야 할 일들을 저버렸기에, 하느님께서는 약한 이들을 택하시어 남성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불쌍한 여성들’에게 의존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기부터 힐데가르트는 시냇물처럼 작품을 쏟아냈는데, 1151년의 <길을 알라>부터, 환시에 대한 <인생의 미덕에 대하여>(The Book of Life’s Merits), 과학을 통해 하느님이 하신 일을 다루는 <하느님의 작품에 대하여>(The Book of Divine Works), 그리고 수도원 순례자들을위한 간호시설에서 직접 관찰한 질병과 치료에 고나한 <병의 원인과 치료>(Causae et Curae) 등 서방약제학의 기초가 되는 기록도 남겼다. 또한 평생 전례에 관심을 가져, 수도원 자매들의 전례와 음악용 교재를 만들고, 1147년부터는 유럽 전역의 수도자와 평신도, 황제와 군주, 교황과 성인들에게 보내는 몇백 통의 편지를 썼다. 즉, 힐데가르트 자체가 서방세계 지혜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한편 여자수도원이 남자수도원에 귀속되어 있던 관행에서 벗어나 10년 동안 투쟁한 끝에 힐데가르트는 독립적인 빙엔의 대수도원장이 되었으며, 유럽전역을 돌아다니며 수도원과 교회의 개혁에 대해 설교했다. 이러한 태도는 기성교회에서 당연히 숱한 반대자를 만나게 했으며, 1178년 80세가 되던 해에 가장 큰 논쟁적인 사건에 휘말렸다. 파문당했다가 복귀한 어느 귀족이 루페르츠부르크의 묘지에 묻혀 있었는데, 마인츠 대성당 참사회원들이 이 유해를 파서 보내라고 한 명령을 힐데가르트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는 이 귀족의 시신을 축성하고, 무덤을 찾을 수 없도록 외부 흔적을 없애버렸다. 이 때문에 힐데가르트의 공동체가 파문당했다.

1179년에 3월에 파문이 철회되었으나, 힐데가르트는 6개월 후인 9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몇 년 동안 기적과 순례가 그치지 않았으며, 독일 전역이 애도를 표했으나, 지난 천년 동안 힐데가르트는 시성되지 못했다. 아마도 너무도 뛰어난 독립적인 여성 수도자에 대한 기억과 교도권에 대한 도전적 태도가 후대 신자들에게 각성시킬까 교회당국자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 힐데가르트의 도판

힐데가르트의 영성은 천국과 지상, 과학과 전례, 음악과 의학, 살아있는 식물의 수액과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은총 충만한 성령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이미지는 ‘초록’이었는데, 이는 다산과 은총과 생명,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상징이었다. 또한 그녀는 최초의 도덕극인 <덕목들>(Ordo Virtutum)에서 모든 덕은 ‘여성적’으로 묘사되었고, 이들 여성들의 대화를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준다고 믿었다.

오늘날 힐데가르트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특별히 생태영성에 영감을 주는 성인으로서, 온 세상이 마치 하느님의 운동장 같으며, 지구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이 하느님의 충만함을 드러내고, 그분이 활동하시는 성사라고 소개한다.

또한 여성신학에도 영감을 주는 성인으로, 남녀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여성은 종종 하느님의 여성적 측면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덧붙여 여성들에게는 남성적 요소인 용기와 강인함으로 스스로 강화시키라고 주문하고, 마찬가지로 남성들에게는 은총과 자비 같은 여성적 자질을 계발하라고 권했다.

수도생활과 관련해서도, 그들이 비록 정결서원을 하지만, 반대 성적인 측면으로 보완될 것을 요청했다. 즉, 힐데가르트는 “여성들이 남성 없이도 완전히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라며, 가장 좋은 수도자의 성격은 다른 성인 여성이나 남성을 필요로하면서, 그들을 친구로 대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태양이 없는 대낮’과 같다고 말했다. 즉, 힐데가르트는 수도자였지만 남녀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성적 활력이 인간의 본질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성인이었다.

결국 금세기에 들어 힐데가르트가 시성된 것은 여성과 생태계에 대한 특별한 교회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교리보다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직접적 은총의 중요성 역시 강조되고 있는 흐름을 드러내고 있다. 다행히 힐데가르트가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마찬가지로 독일인이며, 독일인들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있는 성인이라는 점은 퍽 다행스런 일이라 말할 수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