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희의 행복선언]

“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출근하자마자 요양보호사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전한다. 노인요양병원의 환자들이 다 그렇듯이 할아버지가 남긴 건 약봉지 한 아름뿐. 가족의 배웅없이 쓸쓸하게 떠났다.

4년 전에 할아버지는 이곳 노인요양병원에 왔다.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서다. 가족이 없는 일흔여덟 살의 독거노인인 할아버지를 통장 아주머니가 발 벗고 입원시켰다. 입원환자 대부분이 생활보호 대상자인 병원 측에서는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할아버지가 받는 기초노령연금 9만원과 생계급여비 25만원만 받고 입원시켜 주었다. 덕분에 지난 4년 동안 할아버지는 병원을 집처럼 가족처럼 의지해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심장과 폐에 위험신호가 왔고, 중환자실로 옮긴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통장 아주머니에 따르면, 할아버지에게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지만 헤어진 지 이십년이 넘었다고 한다. 경제적인 이유로 아내와 이혼 후 자녀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소식을 모르고 지하 단칸방에서 홀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통 말이 없었다. 항상 무표정에 굳은 얼굴이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도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시선을 돌려버린다. 농담을 하고 웃고 떠들어도 저만치 떨어져서 말을 섞지 않았다. 체념하고 접고 사는데 익숙해서일까, 아무에게도 속내를 내놓지 않았다.

차갑고 무뚝뚝한 할아버지에게도 예외가 있었으니 김 할아버지다. 동갑내기면서 치매를 앓는 김 할아버지도 보호자가 없는 처지다. 아내와 둘이 살다가 2년 전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병구환에 집과 모아둔 노후자금까지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자 자식들이 연락을 끊었다. 1년전에 할아버지가 치매증상을 보이자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고는 소식이 없다. 병원 측에서도 밀린 입원비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그렇다고 내쫓을 수는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다. 낯선 환경에 할아버지의 치매증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욕설과 막말로 떠드는 통에 골치였다.

김 할아버지에게 위기가 왔다. 할아버지의 밤낮없는 폭언에 참다못한 환자들이 너도나도 방을 바꿔달라고 항의를 하자 할아버지는 오도갈데가 없게 되었다. 그때 최 할아버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동안 꼭꼭 숨겨둔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주위의 불만을 단숨에 잠재우더니 자신의 옆 침대에 김할아버지의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최 할아버지의 강력한 엄호사격아래 김 할아버지는 최할아버지 곁에 둥지를 틀었다.

사건은 다음날 발생했다. 최할아버지의 재산목록 1호인 틀니가 없어진 것이다. 항상 그랬듯이 어젯밤에도 틀니를 깨끗이 씻어 머리맡에 잘 챙겼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틀니가 사라졌다. 온종일 병원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저녁식사 시간. 오늘은 오랜만에 먹음직한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푸짐하게 식탁에 올랐다. 틀니를 잃은 최할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콩나물 국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김할아버지, 평소와 달랐다. 순간 최할아버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치아가 몽땅 빠져버려서 아무것도 씹을 수 없었던 김할아버지가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한 입 가득 넣고 잘근잘근 맛나게 씹고 있지 않은가.게다가 돼지고기 살점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반짝거리는 물체는 틀니였다! 틀니 도둑은 김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날 온종일 아무도 김할아버지의 욕설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영감 줘라” 최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중환자실로 들어가면서, 김할아버지에게 틀니를 남겼다. 그리고 김할아버지에게서 틀니를 빼앗은 것을 후회했다.

늙고 병들고 가난한 어르신들의 종착역인 이곳 노인요양병원은 최할아버지처럼 홀로 외로움과 그리움을 안고 투병하다 삶을 마감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마지막 길에서조차 지켜줄 가족과 이웃이 없는 이분들을 ‘잉여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분들이 생애를 다해 닦아놓은 길 위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이제는 이분들이 손을 내밀수 없게 되었지만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할 차례가 왔다. 지금 이 순간을 이분들과 함께 할 때 어느덧 이분들의 길이 곧 나의 길이 되어 있음을 발견할 날이 오기 때문이다.

요즘 백약이 무효이던 김 할아버지의 욕설은 휴가 중이다. 식사때마다 맘껏 씹고 뜯고 즐기는 행복에 욕하는 걸 잊어버렸을 것이다. 모두가 김할아버지가 남긴 틀니 덕분이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의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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