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대한문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벗, 탁이미정 씨]

철학가 한 명이 그 사람에게 묻는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되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공부하고 고민한 바로는, 생명의 근원 안에서 온 존재로 나 스스로와 이웃을 사랑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 사람이 철학가를 바라보며 천천히 답했다. “알고 계신대로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와락 아이들로부터 시작된 관계, 삶의 축을 옮기다

탁이미정씨는 매일 밤 대한문 앞에 나온다. 강남에 있는 회사에서 퇴근해 도착하는 시간이 보통 밤10시. 그 때에 와서 ‘동생’들이 밥은 먹었나, 필요한 게 없나를 살핀다. 그가 만나러 오는 ‘동생’들은 지난 4월 5일 이후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노숙투쟁중인 쌍용 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다.

“처음엔 쌍용 자동차 사건이 뭔지 전혀 몰랐어요. 집에 TV도 없고 한창 바쁘게 일하던 때였거든요. 정혜신 박사님이 하시는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다녔었는데 작년 3월인가, 트위터에 쌍용차 해고자 아이들이랑 뭔가 하시려는데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 하시더라구요. 마침 아들이 1년 정도 유학 가 있었던 때고 해서 혼자 갔어요. 봉사해야겠다 싶어서. 전에도 성가정 입양원에서 1년 정도 목욕 봉사를 했거든요.”

그렇게 시작됐다. 아이들이랑 친해지고 나니 부모들이랑 친해졌다. 아이들은 아빠를 너무 좋아 했고 아빠도 아이들을 끔찍이 여겼다. 그런 아이와 부모를 만나면서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경영을 공부하고 현재 IT 컨설팅 회사의 CEO인 그는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리해고가 당연하다고 배웠다. 해고는 오로지 능력 없는 개인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렇게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아빠들이 일터에서 불성실 할 거라 여기기는 어려웠다. 의문이 생겼다. “이 사람들이 왜 해고된 거지?”

그 때 한진 중공업 사태가 터졌다. 아이 아빠들이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옆에 있다 보니 자연히 관심이 생겼다. 작년 여름 일주일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이 아빠들이 평택에서 부산 영도까지 걸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9일간 400km를 걷는 ‘소금꽃 찾아 천리길’이었다. 고생하는데 밥이나 한번 사주자고 갔다가 간 김에 영도까지 함께 갔다. 경찰들이 새까맣게 깔려있었다. 도착한 날 마침 수요미사가 시작됐다. 지향기도를 맡았는데 한 줄을 못 읽고 울음이 터졌다. 한번 터진 울음은 ‘울지 말라’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외침 속에서도 그쳐지지 않았다. 이후로 한진 중공업에 자주 갔다. 삶의 축이 옮겨졌다.

나 만이 아닌 다른 이의 행복까지 생각하는 것이 진보, 그래서 하느님은 진보다

2009년에 시작해서 현재 5000여명의 팔로워가 있는 그의 트위터 소개 글에는 ‘하느님도 진보, 나도 진보’라고 쓰여 있다. 가톨릭신자라는 그에게 '왜 하느님이 진보냐?'고 물었다.

“내가 행복하고 남의 행복도 생각하는 게 진보라고 생각해요. 내 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을 짓밟는 건 최악이고. 하지만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할 때 결국 나도 행복하단 걸 깨달았어요. 일타 쌍피죠!”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성당에 다녔다. 어렸을 때는 엄마 손에 이끌려 다녔는데 대학공부를 위해 서울에 온 후 한동안 신앙생활과 멀어졌다. 그러다 인생의 굴곡을 만났다. 사는 게 힘들어졌다. 너무 힘드니 하느님을 찾게 되었다. 성사 볼 때 ‘행복하고 좋을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너무 힘들어지니까 하느님 찾으러 왔다’고 했더니 신부님이 ‘신앙생활 잘했다. 힘들 때 하느님 찾는 거 맞다. 힘 안 들 때 하느님 찾으면 하느님이 너무 힘들다. 하느님이 힘든 사람들 먼저 돌보시게 해드린 거다’라고 했다.

신앙 생활 안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날아가면서 내가 믿을 구석이 있구나. 의지할 구석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깨달았죠. 되돌아보니 삶에 굴곡이 있을 때마다 늘 함께 하셨어요

그런 그에게도 쌍용 자동차의 22번째 죽음은 당혹스럽다. 아니, 당혹스러움을 넘어 절박함으로 다가온다.

희망퇴직 하셨던 분들이 아니라 투쟁하신 분 중에 돌아가신 분은 처음이거든요. 밖에서 연대한다고는 하지만 각자 일상으로 들어가면 해고라는 상황은 개인들이 감당하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요. 그래도 지금까지는 ‘우리는 죽지 않고 싸운다’라는 자신감이 본인들에게 있었는데, 지금은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마저 들 정도에요.”

기나긴 싸움의 한 가운데에서 투쟁의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한 회사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매일 밤 대한문을 방문하는 게 쉽지 않겠다 했더니 “남이 아니거든요. 저한테는 가족 같아요. 지금 내 동생들이 길바닥에서 저렇게 자고 있고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잖아요.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라고 말하며 눈가가 빨개진다. 처음 시작은 '밥'이었다. 퇴근 후에 와서 저녁을 챙겨 먹이고 싶었다. 그런데 분향소 앞의 쌍용차 노동자들은 밥을 삼키지 못했고 계속 울기만 했다. 4월 초, 분향소에는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봄이었지만 찬바람은 그대로였다. 늦은 새벽까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4월 5일 쌍용 자동차 22번째 희생자 관련 기자 회견 뒤 몇 번의 밤샘 싸움 끝에 세워진 대한문 앞 분향소는 지금 40일을 넘기고 있다. 매일 밤 작은 문화제가 열리고 해고 노동자들은 얇은 침낭 하나로 달빛 아래 분향소를 지킨다. 4월 21일 4차 희망텐트 행사 중 연행된 두 명의 쌍용 해고자들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을 때 이틀 만에 탄원서4000장이 모였다. 그도 함께 공부하는 성공회대 노동대학 친구들과 탄원서 40장을 썼다. 덕분에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4월 18일 각계인사들이 모인 ‘함께 살자, 100인 희망지킴이’가 발족되고 공지영 작가가 함께 하면서 분향소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다.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고 기꺼이 책임지고 싶다

그에겐 지금 작은 바람이 있다. 그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을 느꼈던 것처럼 지금 대한문 앞을 지키는 동생들도 ‘기도하니 저 누나를 보내주셨구나’ 하고 느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제가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중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거죠. 쌍용차 동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요. 사랑엔 책임이 따라요.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진다기 보다는 가벼운 책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게 사랑인 거 같아요.”

대부분의 경우 책임은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책임은 늘 무게와 괴로움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담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기꺼이 책임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책임이 사랑의 다른 이름일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사랑인가, 무엇이 옳은 방법인가를 고민하고 머뭇거리기보다는 이웃이 찾아왔을 때 가슴을 열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인터뷰가 끝난 밤 11시 반, “동생들 보러가야지~”라며 그가 웃는다. 힘차고 환한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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