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살아남기-1]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고생은 많았지만".. 다울이는 벽난로를 기웃거리고..

지난 해 11월, 우리 가족은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도 화순으로 이사를 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 사이 그 마음의 거리만큼이나 우리 삶에는 큰 변화가 따랐다. 따끈따끈한 구들이 깔린 흙집에서 기름 보일러가 설치된 콘크리트 벽돌 집으로, 유기농 농사만 짓는 마을에서 제초제와 비닐 없이는 농사 못 짓는 마을로, 사실 거기에서 여기로 온다는 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뒤엉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서였는지, 여러 상황과 인연이 우리를 여기로 이끌었다.

우리 가족에서 주어진 첫 번째 숙제는 겨울을 잘 나는 것이었다. 고유가 시대에 단열이 거의 되지 않는 콘크리트 벽돌 집에서 기름 보일러를 켠다는 것, 그건 손가락까지 떨리는 으스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민 끝에 신랑과 나는 부엌에 벽난로를 만들기로 했다.(처음에는 시중에 나와 있는 난로를 살까 싶어 고물상과 철물점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는데, 마땅한 것을 구하지 못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오븐과 겸용으로 쓸 수 있는 난로가 있어 몹시 탐이 났으나, 그건 가격이 너무 비쌌다.)

평소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을 하기로 유명한 우리 신랑은 철공소에 가서 오븐으로 쓸 스테인리스 상자를 제작했다. 그리고 내화 벽돌, 구들돌, 아궁 철문, 재받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러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저것 재료 구입비며 교통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위에서 그냥 난로를 사지 그러느냐, 벽난로 만들었다가 후회 하는 집이 수도 없이 많다는 등의 얘기를 전해 들으니 지금이라도 벽난로 만드는 일을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신랑의 고집을 꺾기 어렵다는 걸 아는지라 보성에 사는 아는 분께 신랑이 벽난로를 만들려고 하는데, 혹시 조언을 해 주실 수 없느냐 부탁했다. 그분이 집짓기 관련해서 구들 놓기며 여러 가지에 솜씨가 좋으신 분이라 무언가 도움이 될 얘기를 해 주실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분이 말씀하셨다.
“벽난로는 안 해 봐서 잘 모르는디,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겄더라고요. 일단 공사 시작하지 말고, 신랑 데꼬 우리 집에 한번 와보쑈. 얼마 전에 우리 집에 아주 행복한 공간이 생겼는디 그게 두 분 걱정을 싹 쓸어줄지도 모른당께요.”

전화 통화가 끝난 뒤에 못마땅해 하는 신랑을 데리고 당장 보성으로 향했다. 행복한 공간이라니 그게 벽난로와 어떤 관련이 있으며 과연 어떤 공간일까 몹시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그분 댁에 도착했더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실 한 공간에 마련된 실내 부뚜막이었다. 실내 공간에 부뚜막이라니, 현대와 과거가 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인자 여기서 점심 같이 먹어보면 벽난로를 어째야 쓰겄다 답이 나올 것이요.”

그 집 주인장께서 아궁이에 장작을 넣었다. 그러자 어느 샌가 나란히 걸린 국솥 밥솥에서 보글보글 부글부글 맛있는 소리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물론 전기밥솥이나 압력밥솥에 비한다면 밥하는 시간이 꽤 긴 게 사실이지만 그 맛이야 어디 비할 수 있으랴. 주인장은 이렇게 불 때서 밥을 해 먹게 된 뒤로 밥상 앞에서 투정을 안 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나무 하고 불 때서 짓는 밥이니 그만큼 공력이 들어가고 공력을 들인 만큼 밥이 더 고맙고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이 행복한 공간이 주는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밥을 너무 많이 먹게 된다는 것 정도? 우리 또한 그 집에서 밥을 배불리, 달게 먹었다.

▲나름 다용도 벽난로.밥이 익는 동안 가마솥 아래쪽 철판에서는 국까지 끓인다. 마지막에 남은 숯불로는 김도 굽고 고구마도 구워 먹고... 

집에 돌아오며 신랑은 벽난로를 포기하기는커녕 벽난로에 가마솥까지 걸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 또한 불 때서 밥 해먹고 싶은 마음에 그럼 한번 잘해보라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냥 벽난로도 아니고 오븐에 가마솥까지, 어찌 보면 일이 더 커진 셈이다.

신랑은 하루 이틀 골머리를 싸매고 설계도를 그렸다. 그러더니 ‘에잇, 모르겠다. 안 되면 뜯고 새로 하지 뭐.’그러면서 일을 벌였다. 벽돌을 쌓고 흙을 바르고…, 그러는 가운데 부엌은 난장판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괴상한 일을 벌이나 싶어 날마다 시찰을 나와 공사 과정을 점검했다.
“연기가 많이 나서 안 될 텐디. 차라리 방바닥을 뜯고 구들을 놓는 게 빠를 거구만.”
“벽난로? 가마솥? 벽난로면 벽난로고 가마솥이면 가마솥이지 그게 뭔 소리당가?”

어떤 이웃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며 거의 때릴 듯한 기세로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갖은 참견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신랑은 묵묵하게 일을 마쳤다. 마지막에 연기가 잘 빠지지 않아 큰 위기에 직면했지만 연통을 굵은 걸로 바꾸어 달자 연기가 쑥쑥 잘 빠져 나갔다. 실내에서 사용하는 거라 연기가 안 빠질까 그게 가장 염려스러웠는데 다행히 큰 걱정을 덜었다. 그럼 과연 다른 기능은? 밥이며 빵이 잘 될까?

결론을 말하자면 밥은 성공, 빵은 실패다. 애초에 오븐실로 쓰려던 스테인리스 통은 열기가 직접 닿지 않게 하려고 밑에 구들돌을 깔았더니 온도가 빵을 익힐 만큼 높게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용도를 바꾸어 식혜나 청국장 같은 것을 할 때 보온 및 발효실로 쓰기로 했다. 밥도 처음부터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가마솥을 깊은 것으로 바꾸고 불 때는 데를 높이는 등 몇 차례 손을 봤더니 40~50분 정도면 현미밥이 맛있게 잘 익는다. 밥이 익는 동안 가마솥 아래쪽 철판에서는 국까지 끓인다. 마지막에 남은 숯불로는 김도 굽고 고구마도 구워 먹고 말이다. 여기에, 밥을 하다 보면 부엌 난방은 자연스레 해결이 되니, 일석삼조? 아니, 일석몇조라고 해야 할까?

물론 나무 부스러기며 재가 날려 부엌이 쉽게 어질러지기도 하고, 바람이 심하게 불 때는 아궁이 밖으로 연기가 밀려 나오기도 한다. 또, 흙만 발라 미장을 했기 때문에 흙이 갈라져 연기가 새면 수시로 흙을 새로 발라 주어야 하는 수고도 따른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이 벽난로이기도 하고 부뚜막이기 한 요상한 물건 덕분에 지난 겨울을 잘 났다. 크게 추운 줄 모르고 심심해 할 겨를도 없이 말이다.

▲가마솥 누룽지, 천하 없이 고소한 아이들 간식.. 물론 어른도.

요즘에는 날이 많이 따듯해지기도 하고 농번기여서 저녁에만 가마솥에 밥을 지어 먹는다. 밥을 먹고 난 뒤엔 후식으로 가마솥 누룽지를 먹는데, 오도독 오도독 고소한 누룽지를 씹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하나 없다. 고단했던 하루가, 앞서 지나온 시간이 아주 고소하게 갈무리 된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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