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정호경 신부 장례미사 봉헌.. 두봉 주교 "안동교구 한국인 첫 사제인 정호경 신부"

“정호경, 후딱후딱 인터넷시대에 느릿느릿 아날로그인으로 살다”

정호경 신부의 장례미사에서 상영된 추모영상의 자막이다. 4월 30일 정호경 신부(루도비꼬, 71세)의 장례미사가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권혁주 주교(안동교구장)의 주례로 두봉 주교(초대 안동교구장)와 80여 명의 사제들, 가톨릭농민회원들과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다.

▲임박한 죽음을 예고라도 하듯이 정호경 신부가 지난 해 12월에 펴낸 <오늘의 기도>에는 병고에 시달리는 자의 참회의 시편이 가득 담겨 있다. 정 신부는 기도문 말미에 꼭 '아멘 아멘 아멘'하고 세번씩 '받아들임'의 영성을 표명했다.   

이날 미사에서 권혁주 주교는 지난 4월 27일 저녁 정호경 신부가 가족들과 더불어 임종기도를 들으며 ‘평화롭게’ 이승을 떠나셨다고 전하며, 이날 사무실에 돌아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연재되었던 자서전 <내 자랄적에>를 소개하며, “막돌(정호경 신부의 호)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을 띤 이 글에서 정 신부는 자신의 어릴 때 기억과 체험을 통해 ‘다시는 세상에 사상싸움과 전쟁이 없기를 기도하는 마음’을 빌었다”고 전했다. 덧붙여 권 주교는 “전개되는 이야기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고 때로는 난폭하고 처절하기까지 해서 눈물과 분노 없이는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 권혁주 주교는 농민을 사랑하며 스스로 농민이 된 사제 정호경을 회고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 드렸다. 

이어 권 주교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이런 정 신부님을 당신의 도구로 쓰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려 섭리하셨다”면서 “정 신부님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삶을 사시다가 오늘 다시 주님의 사랑받는 사제로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있다”고 말했다. 권 주교에 따르면, 정 신부는 생전에 당신의 장례 때 <주님, 당신 종이 여기 왔나이다>라는 성가를 경음악으로 틀어 달라고 했다는데, 권 주교는 정 신부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염두에 두고 부탁한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권 주교는 정 신부가 손수 새기고 풀이한 전각성경 <말씀을 새긴다>에서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로 시작하는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심판 이야기에 대한 단상을 전했다. 정 신부가 “하느님,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청하자, 하느님은 그게 진정이냐며 “배고프고 외로운 이웃들, 외국인 노동자들, 전쟁 난민들, 환자들, 감옥에 갇힌 이들을 만나 보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 복음은 정호경 신부가 생전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말씀”이라며, 정 신부가 하느님이 자신과 동일시한 부류 가운데 ‘가난한 농민들’을 뺀 것은 아마 정 신부 스스로 ‘가난한 농민’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전했다. 권 주교는 실제로 “정호경 신부는 이 땅의 농민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농민들을 위해 투신하며 싸우시다가 스스로 농민이 되신 특별한 분”이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70∼80년대 어려운 시기에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큰 버팀목”이었고, 그는 “가난한 농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뵙는 신앙”으로 영글어 갔다고 전했다.

한편 정호경 신부는 ‘제도’라는 틀에 부담을 느껴, 봉화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1994년부터는 교구에서 일절 생활비 보조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해서 살아가기를 고집했다고 전했다. 사제로서 마지막 정리도 잘 했는데, 병원에 있는 동안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다 만나고 죽음도 잘 준비”했고, “신부님의 유언에 따라 각막기증도 했다”면서, “신부님의 두 눈으로 빛을 보게 될 사람도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을 뵙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말했다.  

▲ 두봉 주교
영결식에서 두봉 주교는 “정호경 신부는 안동교구의 한국인 첫 사제였다”면서, “45년 동안 사제생활을 하면서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미움도 많이 받고 사랑도 많이 받았다”며, 병원에 방문할 때마다 정호경 신부와 함께 바친 기도를 소개했다.

“사랑이신 주님!
저는 주님 사랑만을 믿고
이 생명 건져 주실 줄 바라며 기뻐합니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결국 모든 게 당신 은총이었음을 확인하며
당신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뼈저린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주님 당신께 기도할 수 있어서
기쁘고 참 고맙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어서 추도사를 바친 정호경 신부의 동창 오태순 신부(서울교구)는 지난 해 11월 류강하 신부가 앞서 선종했을 때 이미 <시편을 묵상하며 바치는 오늘의 기도>를 탈고한 상태였다며 “정호경 신부는 지난 해 5월 삼성의료원에서 진단을 받을 때부터 기도문을 쓰면서 죽음을 준비해 왔다”고 전했다. 오 신부에 따르면, 정호경 신부는 기도문을 완성하고, 정 신부는 붙박혀 있던 봉화를 떠나 걸어서 6개의 섬을 돌며 묵상하는 동안에도 매일 성무일도를 거르지 않았다며 “하느님은 결점도 단점도 좋은 데 쓰시는 분”이라고 전했다.

이어 한국가톨릭농민회의 이상식(대건 안드레아)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정호경 신부가 그토록 갈망하던 농민들의 노동이 활기차게 이어지는 해방된 공동체로 살 것”을 약속했다.

이날 장례미사를 마친 뒤 정호경 신부는 화장 후에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 농은수련원 내 성직자 묘원에 묻혔다.


▲정호경 신부 추모영상(제작: 천주교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의 추도강론에 이어 영결식에서 두볼 주교가 분향을 하고 있다. 

▲정호경 신부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면서 동반했던 오원춘 씨(오른쪽)와 가톨릭농민회 서경원 전 의원(왼쪽)이 미사에 참석했다. 

▲젊은 사제들이 정 신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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