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심명희]

미국에 살고있는 친구 안젤라에게서 소식이 왔다. 요즈음 불당에 다니면서 참선과 불경공부에 열심이라고 한다. 미국에 불교신자가 늘어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죽마고우가 성당대신 절에 간다고 하니 언짢았다. 가톨릭신자로서 자부심이 큰 친구였는데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만 든든한 오른팔을 잃은 것 같아 허전했다.

“안젤라, 지금 갑시다”

“지금 갑시다!” 신부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공소에서의 2박3일 주일학교 교사피정이 끝나는 날이었다. 바오로 선생님이 마을 외곽의 돼지축사에 아이들끼리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자마자 신부님은 즉시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영하 이십 도를 오르내리는 겨울밤의 냉기가 확 몰려왔다. ‘밤이고 길이 어두워 위험하다’는 바오로 선생님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어느새 신부님은 고물차의 운전석에 앉아 부렁부렁 시동을 걸고 우리를 재촉했다. 안젤라와 나를 포함한 4명의 주일학교 교사는 마지못해 신부님의 차에 올랐다.

바오로 선생님의 길안내를 받으며 고물차는 덜컥거리며 꽁꽁 얼어붙은 논둑길을 곡예라도 하듯 달렸다. 얼마나 갔을까? 칠흑같은 어둠을 품은 먼 산 아래에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나왔다. 돼지축사였다. 우리는 깜깜한 축사 안을 더듬거리며 들어갔다.

긴 축사의 맨 끝칸에서 소리가 들렸다. 장판과 골판지, 비닐로 덕지덕지 덮은 문을 밀치자 희미한 백열등 아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땟국이 자르르 흐르는 찌든 이불속에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구지?’ 한다. 온기 없는 움푹 패인 시멘트 바닥에 장판지를 덧댄 방안에 찌그러진 냄비와 숟가락 젓가락들이 라면봉지와 그릇과 함께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렇게 해서 열 살배기 홍옥이, 홍순, 홍주, 다섯살 홍우까지 고아 사남매와 안젤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신부님은 백수에다 냉담자라는 죄목(?)으로 안젤라를 아이들의 보호자로 임명했다. 그때 안젤라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합격한 기쁨도 잠시 타의에 의해 학교를 그만두고 좌절에 빠진 채 고향에 내려와 세상과 교회와 담 쌓고 지내던 때였다. 그때 내가 제안한 것이 주일학교의 보조교사였다.

2박3일의 짧은 피정은 안젤라에게 새 삶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서울에서 이곳 농촌으로 공소사목을 온 보좌신부님은 토박이인 우리보다 더 농촌의 실상을 잘 알았고 아끼고 사랑했다. 안젤라는 다리도 성치 못한 신부님이 공소를 누비며 가난한 농촌 사람과 함께하는 열정과 사랑에 떠밀려 억지로 홍옥 사남매를 맡았다.

매일 아이들이 사는 축사에 들러 청소부터 빨래, 식사, 학습지도까지 아이들을 짐처럼 여기던 그녀도 점점 그들 사남매와 한 가족이 되어갔다. 그들 곁에서 안젤라는 가톨릭신자로 다시한번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을 했고, 신자로서 학자로서 자신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 선우경식 기념 자활터 노숙인 식구들이 알코올로 말미암은 병증을 안고 있으면서도, 축사에 돼지 먹일 사료를 옮기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고창에 있는 '요셉의 집'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인근 농가에서 살다가 최근 다시 '요셉의 집'을 점거해 다시 살고 있다.  

노숙인의 먹먹한 가슴

가톨릭신자가 불경과 참선이 웬 말이냐고 안젤라를 반박했지만 나 역시 그녀와 같은 고민중이다.

한해 전 이맘때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서울대교구 공식기구에 노숙인들과 함께 자활터에서 쫓겨난 억울한 입장과 생존권을 호소하러 간 적이 있었다. 담당 신부님은 노숙인의 절박한 생존의 호소 앞에서 ‘증거’와 ‘객관성’과 ‘공정성’을 내세워 노숙인들의 주장에 합리성과 정당성과 근거를 입증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며 냉정하게 못 박았다.

약자와 피해자 처지인 노숙인들 입장에서는 밥 한 술 얻으러 갔는데 밥그릇을 발로 채인 심정이었다. 그 발언은 못난 놈들의 마지막 자존심과 생존의 의지에 대한 공감의 부족이었고, 가난의 상처를 가진 사람에 대한 ‘결례’였다. 환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탁월한 전문지식을 갖춘 의사라고 해도 공감대와 신뢰가 이루어지지 않는 의사에게는 치료를 맡기지 않는 법이다. 혹을 떼려다가 혹 하나를 덧붙인 모양새가 되어 성당 뜰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노숙인 아저씨들의 먹먹한 가슴이 잊혀지지 않는다.

성당과 절간에서..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성당과 예배당과 절간에서 더 이상 종교로서의 ‘신’의 존재 여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삶’속에 내재된 ‘신’을 찾는다. 하느님 없는 사회가 더 건강할 수도 있다는 어느 신학자의 글이 있듯이, 생각과 지식의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과 삶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는다.

이러저러한 사연 끝에 성당을 떠나 불교의 선방에서 마음의 상처를 달래는 안젤라도 교회를 향해 고민 중인 나 역시 삶속에 내재된 종교를 찾아 교회 밖을 서성거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붙잡는 작은 희망하나. 최근 한 신부님의 법정진술에서다. 그 고백을 교회의 고백으로 삼아 성당과 절간 사이에서 방황하는 친구 안젤라에게 우리가 앉을 자리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자리’ 언젠가 홍옥 사남매를 보살피던 교회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자고 부르고 싶다.

“사제로 살아가는 이유는 아픈 자, 고통받는 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와 함께 하도록 가르침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적 양심에 따라 행동했으며 종교인의 가장 큰 덕목인 연민의 마음으로 강정마을 주민들과 함께 한 것이었다. 비록 펜스를 부수는 행위를 했지만 이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는 호소였다. 이 사순시기에 강정마을의 고통과 함께 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선우경식기념자활터의 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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